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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Jun 29. 2019

<토이스토리 4, ToyStory4 2019>

즐겁지만은 않은

*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렸던 영화였다. 어떤 이는 영화가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말했고, 어떤 이는 실망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후자였다. 이미 토이스토리는 3편에서 완결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굳이 4편은 또 만들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 자체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웃긴 장면도 많았고, 오랜만에 돌아온 캐릭터는 반가웠다. 하지만 오늘은 좋은 점보단 아쉬웠던 점들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토이스토리 1~3편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모험의 형태면서 동시에 회귀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장난감이 집 밖의 외부세계로 갔다가 서로의 화합을 통해 귀환한다. 그 사이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갈등을 겪으면서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토이스토리 4도 기본적인 구조는 같다. 보니 가족이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장난감이 외부세계로 나가며, 우디가 보핍을 만나서 골동품 점에 잡혀있던 포키를 구출하고 다시 보니 가족의 자동차로 회귀하는 그림이다. (결국 우디는 보핍과 함께 떠나지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문스럽고 개연성에 맞지 않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이것은 이전 시리즈(1~3편)에서 보여준 캐릭터가 4편에서 붕괴되면서 일어났던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서사적인 개연성도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 같다. 이제 한 꼭지 씩 잡아 살펴보자. 



#우디는 왜 포키에게 집착하는가? 


우디는 영화 초반부터 후반부까지 보니가 공작시간에 만든 장난감인 포키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이유는 ‘너는 장난감이고, 보니가 너를 좋아하니까 그 애 곁에 있어주어야 해!’이다.


포키는 계속 도망치려고 하고, 우디는 그런 포키를 잡다가 조난당한다. 그러나 1~3편에서 보았던 우디를 생각해보면, 너무 과한 설정이었다. 다시 태엽을 돌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났는지를 생각해보자. 우선, 보니의 변화가 크다. 3편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보니는 앤디만큼 장난감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앤디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우디까지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4편의 보니는 3편과는 달랐다. 우디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보니에게 갖고 ‘놀아지는’ 존재가 된다. 그때, 우디는 크게 실망을 하고 보니의 가방에 몰래 들어가 유치원에 간다. 이것이 1~3편의 우디라면 했을 일일까? 


우디는 이미 토이스토리 1편에서 자신이 주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난감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교훈(?)을 얻었다. 2편에서는 영원히 박제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대신 주인이 바뀌고 낡아지더라도 자신은 주인 옆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말했다. 그리고 대망의 3편에서는 다 커버린 아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아이에게 가서 장난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에 입각하여 생각해본다면, 그가 새로운 아이가 자신을 조금 덜 가지고 논다는 것에 아쉬워하고, 몰래 아이의 가방에 들어가는 행동을 했을까? 포키에게 집착하는 것도 이제 보니에게 관심이 없어진 자신을 대신해서 ‘너라도 저 아이가 잘 놀아줘’가 주 요인이었다고 보는데, 그렇기에는 우디의 동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이는 포키 캐릭터에게 문제가 있다. 어느 정도 우디가 자신을 설득을 했다면, 그것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어야 했는데,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관적이게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다 달리는 캠핑카에서 탈출하지 않는가. 결국 이는 우디와 포키를 조난 상황에 빠뜨리기 위해 포키를 고집불통 캐릭터로 초반에 설정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이런 의도와 맞게 당연하게도, 포키는 우디와 고속도로를 걸어가면서 너무나 쉽게 자신이 보니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 보핍의 등장과 타 캐릭터의 종말


다른 주인에게 팔렸다는 설정을 가진 보핍이 등장하며 분위기가 반전된다. 보핍은 1, 2편의 치마를 입은 양치기에서 이제는 자유로운 장난감이 되어 그녀와 같이 있던 머리 셋 달린 양과 미니어처 경찰 인형과 함께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이는 영화 외적으로 보았을 때 주체적인 여성상을 반영하는 모습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치마를 입지 않으며, 지팡이를 현란하게 사용하는 액션을 하고 터프하게 자동차를 몬다. 여기까지는 좋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변화는 사회상에 따라 충분히 그것을 반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캐릭터가 희생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디는 보핍과 만난 뒤로 민폐 캐릭터가 된다. 무리하게 포키를 구하려다가 보핍에게 ‘넌 도움이 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골동품 점 안의 비밀 클럽 공간(?)에서는 말 조차 하지 못한다. 1~3편의 우디는 분명 달랐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적이었으며, 자신이 잘못했던 일은 곱씹으면서 반성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난감들이 탈출하거나 구조할 때 앞장서서 멋진 계획을 짜지 않았던가. 



버즈의 경우는 더 처참하다. 영화 초반 우디가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는 말을 하고 갑자기 자신 가슴팍에 있는 버튼을 연타하는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행동을 한다. 과연 이것이 버즈가 할 만한 행동일까? 


1편에서 버즈는 자신을 우주비행 전사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자신이 장난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랬던 그가, 장난감 회사에서 녹음된 음성을 ‘내면의 소리’라고 납득하며, 중요한 순간(캠핑카에서 나갈 때 / 골동품 점에서 포키 구출에 실패하고 돌아갈 때)에 그 음성에 따라 행동할까? 그 음성에 따라 하는 행동이야 말로 1편에서 그가 느낀 것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미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장난감이라는 캐릭터가 구축되어 있었는데, 4편에서는 버즈를 멍청이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캐릭터는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렉스와 플랭 키를 비롯한 나머지 캐릭터들은 아예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았다. 1~3편에서 개성을 표출하고, 각자의 특성을 살린 액션(내지는 행동)을 보여준 그들은 이제 없었다. 


그저 캠핑카에 죽치고 앉아 우디나 버즈가 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제시가 차의 바퀴에 구멍을 내고, 다른 장난감이 내비게이션 행세를 하며 브레이크를 밟고, 포키가 문을 계속 잠그는 장면에 유머는 있을지 몰라도 전체 서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연결성은 없었다.
캠핑카는 그들을 외부세계로 나가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막상 나가고 나선 그들을 가두는 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작품일수록,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잘 살릴수록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온 것은 모두 사용하자, 가 작법의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아닐까. 결국 드는 생각은, 토이스토리 4편이 시간에 쫓기다 보니 메인 캐릭터의 서사에만 집중하고 (그마저도 아쉽지만) 주변 캐릭터를 병풍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 <토이스토리>가 말하는 가치?


앞서 말했던 것처럼, 토이스토리 1~3편에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장난감은 아이와 같이 놀 때 가장 행복하다.’였다. 토이스토리 4는 이것을 정면 반박한다. 보핍은 이제 더 이상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당연히 우디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디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과는 다르니까. 심지어 본 4편에서 포키를 구하려는 의도도 포키를 보니의 곁으로 보내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보핍은 처음에 우디를 돕는 것을 주저하지만, 옛정(?)으로 그를 도와준다. 첫 번째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 이후 다시 골동품점으로 돌아가는 것에서는 충분한 동기가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가치와 반대의 가치를 지닌 ‘개비개비’와도 너무 쉽게 화해하고 도와주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다시 토이스토리 시리즈로 돌아와서 ‘자신 만이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3편까지 토이스토리 시리즈가 추구했던 기본 원리는 ‘장난감은 아이들과 놀 때 가장 행복해.’였다. 그래서 ‘주인 없는 장난감’은 우울했고, 장난감은 자신이 버려지거나 주인이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점에서 4편의 보핍이 가진 새로운 가치는 이전의 보수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가치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너무나 급진적이진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거의 20년을 이어온 우디의 생각이 120분이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바뀔 만큼 서사의 논리나 개연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는 굳이 토이스토리가 아니더라도 많이 봐오지 않는가? 장난감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면, 토이스토리 1~3편의 주인공을 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작품을 만들었어야 한다. 감독, 내지는 작가 혹은 디즈니의 임원들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기 캐릭터를 사용해 억지로 입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밖의 것들


토이스토리의 불문율은 “자신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였다. 하지만 4편에서 장난감들의 행동은 그것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내내 사람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놀이공원(카니발)을 대담하게 다니는 모습은 전 편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물론, 1편의 절정에서 시드 앞에서 우디를 비롯한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절정에서의 딱 한 순간이었다. 그 뒤의 차량 장면은 대담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이다. 


 마지막, 보니 가족의 차가 카니발 장소로 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작위적이었는데, 내비게이션과 엑셀까지 조종하면서 사람마저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은 스토리를 엔딩으로 보내버리기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었나,라고 생각한다. 



한편 개비개비의 캐릭터가 너무 어중간했다. 첫 등장에서는 순수하지만 악한 캐릭터로써, 자신이 불량품으로 태어난 후 50년의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한 아이와의 교감을 원한다. 그리고 결국 우디의 소리상자를 자신에게 이식함으로써 꿈을 이루는 듯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여기서 나는 개비개비가 더욱 앙심을 품어 스토리가 더욱더 갈등을 향해 달려갈 줄 알았지만, 영화의 갈등은 거기에서 끝나버린다. ‘알고 보니 얘도 나쁜 애는 아니었어.’라는 서사가 되어버리며, 포키를 구하려고 애썼던 다른 캐릭터들의 행동이 퇴색된다. 


결국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우디와 보핍은 주인 없는 주체적 삶을 위해 떠났고, 개비는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포키를 포함한 나머지 장난감은 보니와 같이 지낸다. 하지만 난 이런 행복이 불편하다. 이것이 내가 토이스토리 4를 재밌게 봤지만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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