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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Jul 28. 2024

‘나’라는 이야기.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중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문법을 설명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문장’이 무엇인지. ‘주어’는 무엇인지. 아이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문장’을 하나의 이야기로, ‘주어’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동사’(영어에서는 품사인 ’동사‘와는 다른 문장 구성요소로써의 서술어를 ‘동사’라 칭하기도 한다)는 주인공의 행위, 혹은 겪는 일로 빗대어 설명한다.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 즉 서사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친숙한 글의 양식이기 때문에 분명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공교롭게도 인간과 서사를 주제로 하고 있는 책 네 권을 최근에 연달아 읽었다. 첫 번째 책은 리사 크론이란 작가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였다. 소설을 간절히도 쓰고 싶었던 내게 친구가 내민 선물이었다. 독특하게도, 인간의 뇌와 본능을 겨냥하여 신경과학적으로 끌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한 치밀한 전략을 설파하는 글이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총은 무조건 발사된다’로 대표되는 떡밥회수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경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는 꼭 알 필요가 있는 정보만을 써야 한다든가, 갈등과 위기가 고조되고 해쳐 나올 수 없을만한 고난을 부여하는 방법이라든지, 주인공의 표면적인 목표와 이야기가 끝나감에 따라 주인공이 겪는 실제 변화 같은 것 등,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는 이야기의 플롯과 흐름을 만드는데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책이었다. 재미없는 글만 쓰는, 그마저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내게 딱 필요한 책이었다.


두 번째는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이란 작가가 쓴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책으로 예전에 ‘빨간 책방’을 통해 내게 큰 신뢰를 줬던 이동진 작가가 추천한 책이었다. 독일 작가들이 쓴 글이라 내 배경지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과한 옹호와 성차별과 관련된 부분의 급진성은 받아들이기엔 버겁기도 했다. 그러나 호모 나랜스(서사적 인간)가 가득한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넘칠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서사적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속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p.137).


인간의 모든 세포는 짧게는 수십일,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파괴되고 새로 탄생한다. 즉, 대략 8개월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나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 즉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며, 그 기억은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주장, 의견이 반박당하면 상처를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책은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이었다. 엔트로피나 양자역학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힘겹게 지나가자 인간의 의식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물리학자인 작가의 소양에 다시 한번 감복하면서 동시에 이거 좀 무리수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역시나 가장 큰 의문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다. 특이점(singularity). 요즘은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매개변수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우면서 인공지능의 성능이 대폭 향상된 경우나, 약 인공지능에서 강 인공지능, 즉 인공일반지능(AGI)으로 넘어갈 가능성 같은)에서 더 많이 들리는 용어지만, 사실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이나 복잡계 이론에서 먼저 사용된 용어이다. 100조 개가 넘는 시냅스의 작디작은 전기신호가 어떤 특이점을 지나 인간의 의식, 혹은 자아, 혹은 이해를 낳는가를 설명하고자 노력했지만. 브라이언 그린과 같은 물리학자가 과학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1인칭의 주관적 감각(?) 같은 것을 과학적인 접근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직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존을 위해 과거의 사건, 경험을 “기억(memory)”하고, 동시에 그 기억을 토대로 “실험(simulation)“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뇌가 진화했고, 그 부산물로 의식 같은 게 생긴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 가장 납득이 된다.


이런 생물학적 유추가 아마 네 번째 책 <‘나‘라는 착각>에 영향을 끼친 듯했다. 작가인 그레고리 번스는 인간의 자아를 과거의 자아, 현재의 자아(아주 짧은 시간 속), 그리고 미래의 자아로 나눈다. 또한 컴퓨터의 압축파일처럼 인간은 기억을 압축해서 저장하고 그 불완전한 기억을 꺼낼 때 빈 공간을 서사로 메우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주어지는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처럼 뉴런이 연산을 하여 여러 후보 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고도 말한다. 어렵다. 말미에는 조금 과격한 감이 없지 않지만 조현병과 같은 정신적 질환과 평범한 인간이 가진 정체성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와 개인의 첫 경험, 타인과 집단이 심은 믿음 등이 뒤섞인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이란 뜻을 가진 ‘identity’의 동사형은 ‘동일시하다’라는 의미의 ‘identify’이다. 내가 가진 정체성은 타인과, 이 세상과 관계 맺음을 하며 서로를 비추면서 완성된다는 뜻일 것이다.


뭔지 잘 이해도 안 가는 딱딱한 책을 때로는 흥미 있게 때로는 억지로 읽어 내려가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이야기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야기, 즉 서사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글의 형식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서사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자신과 세상을 구별해 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이는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지, 엄마와 아빠는 나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을 이해한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 주인공에게 이입해(정말 그렇다 뇌과학적으로도 그 주인공이 된다고 한다) 그/그녀의 삶을 살며 엄청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가 식당 티슈에 썼다는 루머가 있는(실제로는 아니란다) 앙상한 여섯 영단어로 이루어진 가장 짧은 소설을 읽고 눈물을 훔칠 수도 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결국 글쓰기는 나에 대해, 아니 나와 너와 우리가 속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하는 이야기다. 물론 꼭 글을 쓰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영화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운동 경기를 하거나 관람하고, 술자리에서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모든 것들이 서사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겪었거나 겪고 싶었던, 후회했던 일이나 관찰했던 것들을 이야기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읽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몰입하며 자신의 서사를 재구성하기를 바란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한 바람이라 상상이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려보고 싶다.


 <‘나’라는 착각>을 쓴 그레고리 번스는 우리는 매 순간 매 경험을 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바꿔나간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읽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이 글을 쓰기 전의 나와 이 글을 완성한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만약 이 허접하고 짧은 글을 끝까지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역시 이전과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덧.

오래전 내가 만든 노래에 친구가 가사를 붙인 적이 있다. 같이 신해철을 좋아했고 음악을 좋아했던 녀석인데, 막내라서 자의식이 강한 놈이었다. 언젠가 정치적 논쟁으로 의절했었다.

가사는 이랬다.


무거운 발걸음
지친 내 마음
그 거리에서
가벼운 웃음 짓고
내 안의 뒷모습
같은 줄 달랐던 나
내 가슴 홀로 두드리네

오늘도 난 말하네
괜찮아
떨리는 두 주먹
굳게 쥐고


이젠 새로운 건 없어
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
그렇게 살아온
내 모습 나쁘지 않아
가장 나 같은 나


가사에 ‘나’나 ‘내’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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