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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15. 2023

파닉스(phonics)의 함정

한국의 조기 영어교육에 관해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닉스는 단어가 가진 소리, 발음을 배우는 교수법이다. 물론 단어를 읽기 위해서 그 발음을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파닉스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초기 영어학습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영어교육뿐만 아니라 사실 미국 초등교육에서도 파닉스는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이는 철자법의 깊이(orthographic depth)라는 개념과 큰 관련이 있다.


얕은 철자법(shallow orthographies)을 가진 언어는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굉장히 명확하다. 다시 말하면, 철자와 그 철자가 나타내는 발음이 거의 일대 일 대응으로 한 철자의 발음을 습득하게 되면 웬만한 단어는 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스페인어나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로 casa(집)는 [까사]라고 발음하며 mapa(지도)는 [마빠]로 읽으면 된다. 두 단어의 'a'는 모두 [아]로 발음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a'라는 철자의 발음 한 가지만 습득하면 된다. 넓게 보면 우리말 역시 얕은 철자법을 가진 언어라고 분류할 수 있다-세종대왕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물론 음운론 규칙(phonological rules)이나 상보적 분포(complementary distribution), 이음(allophone) 등의 철자의 환경과 그 영향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이야기하면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되긴 하지만.


반면, 깊은 철자법(deep orthographies)을 가진 언어는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철자가 다른 단어 속에서 여러 가지 다른 소리로 발음될 수도 있고, 어떤 한 발음은 여러 철자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 영어가 대표적인데, 예를 들어, car(자동차)의 우리말 독음은 [카] 혹은 [카ㄹ] 정도로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care(돌보다; 돌봄)는 [케어]로 발음한다. 또한, come(오다)의 과거형인 came은 [케임]으로 발음되고 hat(모자)는 [햇]으로 발음된다. 즉 같은 모음인 'a'이지만 어떤 단어에서는 [아]로 발음이 되고 또 다른 단어에서는 [에어]나 [에이], 혹은 [애]로 발음이 되는 것이다-영어사적으로 필경사들이 care나 take처럼 모음의 길이가 긴 경우에 마지막에 철자 ‘e’를 붙여서 표시해줬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어에서 'a'라는 철자를 안다는 것은 이런 다양한 단어 속에서의 서로 다른 발음도 함께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ghich'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enough’에서의 'gh'는 [f] 발음이며 'chandelier(샹들리에)'의 'ch'는 [ʃ]로 발음된다. 이 철자법을 적용하면 'ghich'는 'fish(물고기)'와 똑같이 [fiʃ]로 발음할 수 있다. 참으로…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영어가 깊은 철자법을 가진 언어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오랜 기간 동안 라틴어나 불어, 북유럽 쪽 언어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반적으로 'ch'는 [ʧ], 우리말로 독음하면 [취] 정도의 발음이 난다. 하지만 특정 시기(구체적으로 노르망 정복 시기)에 유입된 프랑스어의 영향으로 'brochure(브로셔),' 'champagne(샴페인)' 같은 단어에서 'ch'는 [ʃ], 우리말로 독음하면 [쉬] 정도의 발음이 된다.


여기서 파닉스가 중요해진다. 이런 복잡하고 혼란한 철자와 발음 관계 역시도 어느 정도 규칙성을 띄고 있어서 적절히 체계적으로 묶을 수 있다. 이런 규칙을 빈도가 높은 어휘를 가지고 흥미를 끌 수 있는 방식으로 반복 연습을 시키면 학습자가 영어 단어를 읽을 수 있게 된다. 파닉스는 영어 알파벳 읽기를 가르치는데 굉장히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영어 모국어 화자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생각해 보라. 문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5~6살 시기에 영어 모국어 화자는 이미 그 언어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천 단어의 뜻과 발음을 알고 있고 적절한 문법적 지식으로 복잡한 복문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다만, 아직 인지발달 단계상 추상적인 이론이나 개념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법지식, 발음지식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문자를 읽을 수 없을 뿐, 완벽한 언어구사자이다. 그런 그들에게 파닉스를 통해 문자를 읽는 권능을 쥐어준다면. 환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고, 티브이 속 자막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게 되면서 엄청난 양의 어휘와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의 지평을 급격히 확장시킬 수 있다. 깊이가 깊은 철자법을 지닌 영어 모국어 화자들은 파닉스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파닉스는 얼마나 도움이 될까?


교실이나 길거리에서 영어에 둘러싸여 있을 수 있는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아이라면 영어 모국어 화자 정도의 언어지식을 쌓고 충분히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을 간 시기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잘할 수 있다. 아.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놀랍게도 생후 6개월 정도가 된 아이가 미국으로 이민 간 경우에도 성인이 되었을 된 후의 발음이 영어 모국어 화자와의 그것과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영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우는 경우에 당연히도 무(無)에서 시작하는 거다. 물론, 한국어라는 모국어 지식이 영어 학습에 도움을 줄 수도 있긴 하지만 영어와 한국어는 발음과 문자뿐만 아니라 구조와 화용, 사고의 범위까지 차이가 커 그 도움도 크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은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말뿐만이 아니라 문자를 읽는 법까지 가르친다는 건. 짐을 두 배로 짊어지게 하는 꼴이다.


영어 유치원에서 파닉스의 일환으로 배우는 챤트(chant) 같은 것도 발음 정도를 제외한다면 아이들의 영어학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외워서 유창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심하게 표현하면 잘 외워서 읊는 아이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부모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 실제로 이른 시기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그룹과 좀 더 인지적 성장이 이뤄진 후 배우기 시작한 그룹을 비교했을 때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두 그룹의 영어 학습에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는 연구도 있다. 오히려 인지 발달이 더 된, 영어학습을 늦게 시작한 그룹의 경우 문법과 같은 추상적인 지식의 습득은 더 잘하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을 들어 어린 시절 영어에 노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정적 시기 가설이 아직까지 왜 이론(theory)이 되지 않고 가설(hypothesis)로 남아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결정적 시기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아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성인이 된 후에 외국어를 잘 습득하는 사례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 그래서 요즘은 '결정적 시기'보다 '민감한 시기(sensitive period)'라는 완화된, 중립적인 표현을 선호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너무 어린 시기부터 아이들에게 파닉스로 영어 단어나 문장 읽기를 가르치는 방법은 큰 효과가 없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히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시기에는 우리말을 더 탄탄히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곳에서 영어를 잘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외국인과 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다. 학교에서 하는 수업도, 산술적으로만 계산해 보아도 초등학교 3학년 주당 1~2시간으로 영어를 시작하여 고등학교 3학년까지 정규 수업시간에 고작 1,000시간도 되지 않는다. 7~8년간 고작 이 정도 시간 안에 의사소통 4기능을 배우고 원어민도 이해하기 힘든 수능지문을 읽어내도록 요구하다니. 아니, 영어 유치원에서 이제 우리말을 겨우 습득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언어 습득과 문자 읽기까지 요구한다는 것부터가 슬픈 일이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영어교사 하나가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에 관해 이게 맞다, 이게 틀리다고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밥그릇인데, 어릴 때는 영어공부 시키지 마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그저 아이들이 너무 어린 시절부터 영어공부에 대한 짐을 짊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그리고 앞으로 자녀의 영어를 걱정할 부모님들께서 한 번 생각해 주십사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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