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에 대한 짧고 얕은 소감
한국 영어교육의 현실적 목표는?
이번에 바뀌게 될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어 의사소통의 함양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까지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교육과정이 지난 교육과정들과 가장 두드러지게 달라진 부분은 영어 기능의 분류 방식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까지 영어 학습은 4기능, 즉, 듣기(Listening), 말하기(Speaking), 읽기(Reading), 쓰기(Writing)의 고른 발달을 강조했다면,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에서는 듣기와 읽기를 묶어 이해(reception)로, 말하기와 쓰기를 묶어 표현(production)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잠깐 영어 4기능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영어의 4기능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 번째로, 말, 즉 음성을 주고받느냐, 문자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듣기, 말하기를 한데 묶어 음성언어(spoken language)라 하고 읽기, 쓰기를 묶어 문자 언어(written language)라고 나눈다.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에 비해 보다 일상적이고, 더 쉽고, 빈도가 높은 어휘가 많이 쓰이며, 덜 복잡한 문장 구조를 지니며-보통 단문으로 많이 연결된다-, 문법적 오류가 비교적 많다는 특징이 있다. 반대로, 문자언어에는 좀 더 격식이 있고, 빈도가 낮은 어휘가 많이 쓰이고, 복잡한 복문이 많다. 그래서 음성 언어는 (모국어의 경우) 아주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습득(acquisition)’하게 되며, 문자 언어는 학습자의 인지적 발달이 있은 후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학습(learning)’된다. 그래서 리터러시(literacy)란 개념은 음성언어보다 문자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물론 요즘은 여기저기 다양한 차원에서 리터러시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분류를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언어 기능에 따라 언어의 복잡성을 고려하여 수업을 구성하게 한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 다른 차원의 분류는 앞서 언급한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에서 분류한 방식으로 학습자가 언어를 받아들이는 기능, 즉 듣기와 읽기를 이해 기능(receptive skills)으로, 언어를 발화하는 기능, 즉 말하기와 쓰기를 표현 기능(productive skills)이라 묶는다. 이는, 학습자에게 입력(input)을 제공하느냐, 출력(output)을 생산하게 하느냐의 문제이며 어떤 수업을 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이해 기능이 표현 기능에 비해 향상하기 쉽고 그래서 교수법을 적용하기에도 용이하다. 특히, 1970년대 크라셴(Stephen Krashen)이란 학자를 중심으로 입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물결이 있었다.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과거 침묵 학습법(Silent Way)이라는 교수법의 초기 단계에서는 극단적인 학생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교사도 말을 하지 않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어학습에 있어서 상호작용과 출력을 유도하는, 즉, 말을 시키고 글을 쓰게 하는 것 역시 입력의 제공만큼 중요하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학습자가 자신이 학습한 언어지식을 활용하여 유의미한 의사소통을 하게 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의 발화와 이상적인 발화의 차이를 깨닫게 하고 언어 자체에 관해 논의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언어학습의 중요한 영역이다.
이처럼 영어 4기능의 고른 발달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 이전에는 영어 4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우리나라 현실을 돌아보고 잘 반영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이전 교육과정에서 영어 4기능에 관한 논의에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한 비판적인 수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공통교육과정 내에서 학교급별 4기능에 관한 목표들만을 추상적으로 나열할 뿐이었다. 이는, 국가교육과정을 실천하는 현장 교사들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4기능을 균형 있게 가르쳐라.
맞는 말이다. 이상적으로 당연히 4기능을 골고루 균형 있게 가르치면 아이들의 의사소통기능은 쑥쑥 자라날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4기능은 각각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라 각 기능끼리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어 한 기능의 발달은 다른 기능의 발달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4기능을 통합적으로 가르칠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보통 대화를 한다는 행위는 화자의 말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고-이해하고-반응하는 고리가 끊임없이 연결되는 상호작용이지 않은가. 그래서 교과서도 4기능으로 분류가 되어 있고, 교사들도 되도록 다양한 활동과 매체를 활용해 듣기, 말하기 수업도 풍성하게 만들어, 읽기와 문법 위주의 강의식 수업을 피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공교육 속에서 영어를 학습하는, 적당히 사교육은 받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외국어로써 영어 학습은 환경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제2언어로써 영어(English as a Second Language: ESL) 학습이다.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학습자가 영어를 학습하는 경우, 또는 영어를 공용어나 제2언어로 사용하는, 싱가포르나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영어를 학습하는 경우이다. 이 환경 속에서는 교실 안팎에서 영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존재하고 티브이에서는 영어가 항상 들이며, 길거리 간판과 관공서의 안내문 같은 것도 영어로 쓰여 있다. 특히, 이민자의 경우에는 교실에서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의 학습자들끼리 영어로 소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경우도 많다.
이와는 반대로, 외국어로써 영어(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EFL) 학습 환경이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이 있는데, 영어 과목은 존재하지만, 교실 안팎에서 영어를 접하기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하는 영어교육이다. 길거리에서 영어를 듣고 대화할 기회는 적으며, 교실은 같은 모국어를 쓰는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고, 수업은 대부분 모국어로 진행된다. 티브이에서 영어를 많이 접하지 못하고-요즘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티브이 등을 통해 잘 접할 수는 있다-. 즉, EFL은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충분하지 않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0년 간 일주일에 3~4시간 영어 수업을 듣는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나라 학습자는 학교에서 4시간 * 45주 * 10년 = 1,800시간 동안 영어를 학습한다.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기에는 한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 만 시간을 영어에 노출되는 영어 모국어 화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은 시간이다.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기에는 한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간을 학습하는 경우에도 짧은 기간에 한번에 오래 학습하느냐, 긴 기간 동안 띄엄띄엄 학습하느냐에 따라서도 학습 결과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고작 2,000시간도 되지 않는 EFL 환경에서 주 당 3~4시간 띄엄띄엄 수업을 통해 4기능을 고루 발달시켜 외국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영어로 의사소통 역량을 키운다는게 어떤 건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영어 드라마와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수준인지, 외국인과 어려움 없이 다양한 주제에 관해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인지, 해외여행 중에 호텔을 예약한다거나 식당에서 주문을 할 수 있는 수준인지, 영어 원서로 된 전공 서적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지 등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다만, 이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고 '환상을 버릴'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어를 어느 수준까지 활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또한, 보통의 평범한 한국인 학생에게 외국인과 유창하게 영어로 소통하는 수준의 능력을 바라는 기대도 포기해야 한다. 학교에서 4기능을 균형있게 골고루 가르치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은 과거 4기능의 고른 발달을 주문처럼 읊어왔던 교육과정에 비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는 조금 만든 것 같다. 개별적으로 나열했던 4기능의 세부 목표를 두 그룹으로 통합하면서 단순화 시켜 교육과정을 실현해야 하는 교사들에게 수업의 자율권을 좀 더 부여하였다. 특히, 요즘 유튜브 같은 온라인 환경에서의 영어학습을 반영하여 1차원적인 듣기(Listening)나 읽기(Reading)가 아니라 영상을 보면서 소리를 듣거나 글을 읽는 보기(Viewing) 기능에 대한 논의를 끄집어 낸 지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보면서 듣는다, 이 현상에 관한 McGurk Effect라는 재미있는 연구를 아래 소개하겠다-.
다만, 각 기능에 관한 세부목표는 과거의 교육과정과 같이 상당히 추상적이다. 때때로 수업 평가 계획을 세울 때 세부 목표를 보다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에 내 수업과 평가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갈팡질팡할 때가 있다. 유럽의회에서 설정한 유럽공통 언어기준(The 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 for Languages; CEFR)이나 미국외국어교육위원회(American Council on the Teaching of Foreign Languages; ACTFL)에서 제공하는 수준의 구체적인 세부 목표를 개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만, 한국인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짧게 결론을 말하자면, 이번 2022 개정 영어 교육과정은 4기능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는 환상을 가졌던 영어교사들이 부담을 조금 더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실증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세부목표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는 듯 하다. 때로 우리는 '교육이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 같은 것에 너무 몰입해 있다. 특히, 교사들은 더욱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학생들이 좀 더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위해서는 우선 학생들이 영어를 아주 잘하게 만들려는 욕심, 환상을 버리는 일에서 출발해야 할 듯하다.
덧. McGurf Effect란 보는 것이 듣는 것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아래 영상에서 남자가 하는 발음을 우선 눈을 감고 들어보라.
그 후에 다시 눈을 뜨고 들어보면 완전히 다른 발음으로 들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aFPtc8BVdJk
눈을 감고 들었을 때엔 '바'로 들릴테지만, 눈을 뜨고 들으면 '다'나 '가'로 들릴 것이다. 이런 이유는 우리가 실제 소리인 '바'와 화면 속 남자가 '가'를 발음하는 모습을 함께 듣고 보기 때문이다. 자음 [b] 소리는 유성 양순 파열음(voiced bilabial stop)이어서 양입술을 붙였다 때면서 소리를 낸다. 반면, 자음 [g] 소리는 유성 경구개 파열음(voiced palatal stop)으로 혀의 뒷 부분을 입 천장 뒷 부분에 붙였다 때면서 발음한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보고 듣는 두 개의 소리의 중간 지점에서 나는 소리인 자음 [d] 소리(유성 치경 폐쇄음(voiced alveolar stop); 혀 앞부분을 윗니와 입천장 사이에 붙였다 때면서 내는 소리)로 이를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