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댄스댄스댄스 Oct 01. 2023

긴급출동 SOS 24

201X년 초임교사 때 만난 이수정

이 글에 쓰인 모든 이름과 명칭은 가명이며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왜곡된 사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2월 말 처음 발령장을 받고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동네의 중학교로 출근하게 되었다. 수업준비, 담임준비, 마음의 준비 모두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폭풍과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1학년 1반 30여 명 학생들의 등쌀은 이제 막 교사가 된 나에겐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아이들은 달래거나 어르거나 혼내거나 욕하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지지고 볶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였다.  수정이는 개학식 때부터 등교하지 않았고 학생과 학부모 연락처가 없었던 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첫 주 후반이 되었을 때, 졸업한 초등학교와 연락이 닿아 겨우 6학년 때 담임과 통화할 수 있었다. 학부모 연락처와 아이의 가정환경에 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연락처로 ‘추정’되는 번호와 주민센터의 담당 사회복지사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 전화번호부에 ‘이수정 추정번호’로 저장했다.


몇 년 전부터 학업중단 위기학생을 위해 미인정결석과 유급에 관한 관리, 대응방안에 관한 매뉴얼이 있어 초임교사가 담임을 하는 경우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게 연수와 안내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초임인 나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해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뭐 어쩌겠나. 아무것도 모르는 초임은 혼자 이 일을 감당해야 했다. 여기저기 물어물어.


주민센터 사회복지사와의 통화로 아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이의 부모는 이혼을 하였다. 아버지는 소재파악이 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부천에 살고 있었다. 근데 아이는? 아이는 학교 바로 앞 임대아파트에서 성인이 된 첫째 오빠, 고등학생인 미성년 둘째 오빠와 셋이 살고 있었다. 고작 2분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임에도 등교하지 못하는 수정이의 상황은 초임이었던 내가 보아도 심각해 보였다.


당시 갈등이 있거나 위기에 처한 이들을 조명하고 솔루션을 제공하는 긴급구조 SOS 24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회복지사와 처음 통화할 때 자세히 듣지 못해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가정이라고 들었다-직접 가정방문 할 때 알게 되었지만 그 프로그램에서 다룰 ‘정도’로 심각하다는 이야기였다고 했다-. 전 해, 그러니까 수정이가 6학년일 때 한번 주민센터에서 청소용역업체에 의뢰를 해 가정에 쌓인 쓰레기를 대량으로 버리고 청소를 한 일도 있다 하였다.


더 큰 문제는 행방이 묘연한 아빠는 물론 재혼한 엄마와도 통화하기 힘들었다는 것. 결국 학기가 시작하고 둘째 주가 끝나기 전에 나는 사회복지사와 함께 수정이네로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다.


작은 거실 겸 부엌과 큰 방, 작은 방이 있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수정이와 큰 오빠를 처음 볼 수 있었다. 현관을 들어가며 복지사는 “또 쓰레기 쌓고 있네, 어쩌나” 하며 혼잣말을 했다. 거실 바닥에 수정이와 큰 오빠, 복지사와 나 이렇게 넷이 앉았다. 낡은 갈색의 장판은 여기저기 해져 있었고 벽지도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거실 한쪽 벽에는 우리 학교 여학생 교복이 걸려 있었다. 수정이 옷이었다. 수정이는 생각보다 덩치가 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순박하지만 슬픈 표정이었다. 낮은 코에 낮게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숱이 많고 굵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었다. 오빠는 긴 얼굴에 뿔테안경을 쓴 마르고 부실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긴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수정이와 오빠는 거의 말이 없었다. 복지사와 내가 학교 잘 등교해 달라는 당부에 고개만 끄덕일 뿐.


“저 집 내년이면 둘째도 성인이 돼서 아동수당이 또 줄거든요.”


아파트를 나오며 한 복지사의 말에 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다음날부터 수정이를 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오빠가 교문까지 바래다 주기 시작했다. 가끔 출근길에 수정이를 학교로 보내고 되돌아오는 오빠를 만나 인사할 때도 있었다. 꽤나 자주 지각을 했고 또 매번 조퇴를 원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왔다. 웃음이 많지는 않았지만 쑥스러움과 능글능글함이 공존하는 미소로 조퇴 신청을 하러 교무실에 찾아오기도 했다. 가끔 반 친구들과 말을 섞는 모습도 보였다. 날카로운 아이가 아니어서 안쓰럽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때로 며칠 결석을 하기도 하였는데, 겨우 연락이 닿은 엄마 말로는 부천에 있는 자기 집에 왔다 가는 거라 무단결석-지금은 미인정결석이라고 한다- 처리를 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어머님께 수업일수 3분의 1을 결석하면 유급 처리가 되고 현재 수정이는 며칠 결석이니 신경 좀 써달라 매번 장문의 문자로 호소했다.


수정이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초반에 며칠 학교를 안 나왔다. 아마 부천 어머니 댁에 머물러 오지 않은 듯했다. 어머님께 연락을 드리고 나서 수정이는 다시 등교하였다. 하지만 곧 학교에 있는 상담선생님으로부터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엄마와 재혼한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된다는. 지금은 아동학대를 인지하고 바로 신고를 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그때도 그랬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상담 선생님이나 주민센터 복지사를 통해 신고가 들어갔는지 수정이는 곧바로 대안학교로 보내졌다. 나는 담임으로서 몇 가지 서류를 제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의 엄마나 계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수정이가 간 대안학교는 독특하게도 이름에 ‘뽈’ 자가 들어갔다. 나는 담임으로서 어느 날 그 대은학교에 방문했다. 동대문구인지 은평구인지 낯선 동네에서 힘들게 길을 헤매다 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수정이 담임을 맡고 있다는 덩치가 크고 무섭게 생긴 털보 선생님의 안내로 수정이가 머무는 기숙사를 찾아갔다. 여학생들이 모여 2층 침대 여러 개를 두고 생활하고 있었다. 수정이는 여전히 쑥스러우면서 동시에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교 생활이 힘들지만 여기 언니, 동생들이 좋다고 얘기했다.


2학기 성적 문제로 수정이가 있던 대안학교로부터 아이의 성적을 받고자 그곳 담임 선생님과 몇 번 더 연락을 주고받았다. 수정이는 그곳에서도 쉽지 않은 생활을 한 듯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의 첫 1년을 마무리하였다. 종업식 때 우리 교실에 수정이는 없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2학년이 된-여전히 대안학교를 다니는- 수정이의 새 담임 선생님께 아이에 대해 인수인계를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교무실에 온 수정이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1학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표정과 분위기. 여러 가지 문제로 그 대안학교에서도 퇴소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도 아이는 생각보다 낙천적으로 보였다. 그 후 부천으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언뜻 들었지만 나는 다시는 수정이를 볼 수 없었다.


초임이라는 핑계로 담임으로서 수정이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었다. 10년이 넘은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건강히 자랐다면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을 테다. 그때의 쑥스러우며 동시에 능글능글한 미소를 잃지 않았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 영어교육의 현실적 목표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