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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Oct 27. 2024

밥로스와 소유욕

명상일기


어젯밤 잠들기 전 평소처럼 스마트폰으로 ‘마음 챙김 명상’을 하나 틀었다. 주제는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고 내 생각을 들여다 보기였다. 언제나처럼 베개를 고쳐 베고 누워 몸에 힘을 내려놓는다. 특히 항상 바짝 당겨져 있는 내 미간의 긴장이 풀리면서 이마는 편안해진다. 리드미컬한 들숨과 날숨, 그와 발맞춘 내 가슴과 배의 부풀어 오름과 내려앉음을 느낀다. 그리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여러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주 가벼운 이명 증세가 있어 약하게 바이올린의 높은음을 현으로 천천히 긁는 소리가 배경처럼 깔려 있다. 생각보다 커다랗게 ‘척척’ 거리며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 가끔 ‘우웅’ 거리며 화내기 시작하는 김치냉장고 소리. 내 숨소리. 가끔씩 저 멀리 아파트 현관 자동문이 ‘즈앙’하고 열렸다 닫히는 소리. 어디선가 위층에서 ‘스르륵’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와 멀리서 ‘야르르’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 건물 밖 주차장에서 ‘드르르‘ 하는 차 엔진 소리. 침묵의 밤공기 속에서도 세상이 흘러가며 새어 나오는 다양한 소리를 듣는다.


신중하게 귀 기울이며, 가끔은 미간이나 어깨에 긴장이 돌아온 것은 아닌지 내 몸을 들여다본다. 어느새 가이드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을 들여다 보라 안내했다. 낮은 남자 목소리는 내게 내 마음이 강이라면 생각은 그 강 위에 떠가는 부유물이라 설명한다. 명상을 한다고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물방울이 떨어지며 표면에 퍼져가는 파문은, 즉 어떤 생각에 따라오는 내 감정은, 비판하거나 억제하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면, 약하게 만들거나 소거할 수 있다. 끝없이 흐르는 마음의 강에서 작은 부유물인 생각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문뜩 떠오른다. 어린 시절 EBS에서 어머니와 함께 즐겨 봤던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따뜻한 기억이다. 웻페인팅 기법으로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그린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한 산과 호수, 침엽수와 노란 들풀이 떠올랐다. 작은 나이프와 얇고 넓은 붓을 이용해 신비롭게 그려나가는 궤적. 빛의 반사, 예상치 못한 색의 반전, 그럼으로써 시야의 먼 곳부터 펼쳐지며 다가오는 전경을 어머니와 나는 놀라움 속에 바라봤다. 더빙 성우의 유려한 말투와 그 너머 작게 겹쳐 들리는 밥 로스의 웅얼거림과 밑에 깔린 마이크 잡음까지. 따뜻하지 않은 데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꽤나 두둑이 받은 세뱃돈을 손에 꼭 쥐고 육교를 건너 시내로 나가면 바로 있었던 2층의 화방.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가 한창 인기 있을 당시 그 화방의 중간에 떡하니 전시되어 있던 밥 로스 그림 세트. 아마 그 안에는 큰 이젤과 캔버스, 그가 쓰는 오일 물감과 붓, 나이프, 팔레트 등이 들어 있었겠지. 25년 정도 전 가격으로 대략 20만 원이 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나는 순수하게 밥 로스 아저씨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사지는 않았다. 다시 문뜩 질문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순수하게 가졌던 그 소유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물론 나이를 먹은 지금도, 돈을 더 벌고 싶고, 내 아파트를 갖고 싶다, 좋은 차를 갖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저 순수히 그걸 꼭 품고 싶다는 그런 강렬함 같은 감정은 없다. 뭔가 미래를 대비하여, 가족을 위하여 마련해야 하는 의무감이나 준비물 챙기기 같은 그런 소유욕. 밥 로스의 그림세트를 갖고 싶고, 좋아하는 가수나 작가의 전 앨범이나 소설집을 소유하고 싶은, 다양한 버전의 프라모델이나 게임팩, 또는 만화책 전권을 소장하고 싶은, 그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내 안에 비어있는 저장고를 채우고 싶은 그런 소유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아이는 어떤 효용을 위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 공원의 작은 나뭇잎, 스스로 만든 색종이 조각, 작은 인형, 축제 때 선물 받은 분홍 문어 풍선을 그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손에 쥐고 싶어 한다. 다른 친구의 멋진 유니콘 킥보드를 볼 때, 심지어 자기도 킥보드가 있으면서도,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때로는 모르는 언니가 입은 예쁜 드레스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식의 순수한 갈망, 소유욕이 있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언제가 기점이었을까. 내 소유욕이 내 소유의 부족함으로 좌절되기를 반복한 어느 시점에 그 간절함이 닳아버려서일까. 아니면 이미 가족이란 지상 최대의 소유 목표를 이루어서 더는 간절함이 필요 없어진 걸까. 그저 시간의 풍화를 겪은 것은 아닐까. 아님 정말 노쇠에 따른 호르몬의 작용일까.


유치원 설명회에서 떼쓰는 아이를 위해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부쳐 만들어준 색종이 조각, 겨우 달랬다.


빈약해진 욕망의 앙상함 속에서도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출간을 하고 싶다는 소망은 아직 메마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불씨도 언젠가 꺼지고 차가운 어른이 되어버릴지도. 명상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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