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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18. 2023

『Refuge』와 『달팽이 안단테』서평 (2)

자연 속에서의 치유와 인간의 상상력에 대하여

한 6년쯤 전, 대학원에서 인지(cognition)라던가 언어학 같은 골치 아프고 무미건조한  수업들 속에서 유일하게 감성을 건드려준 수업이 있었다. 미국문학 속에서의 자연주의에 관한 깊이 있는 수업이었고 이 부족한 글은 그때 썼던 몇 안 되는 서평 중 하나이다.


Ⅲ.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에서 달팽이의 삶


 2010년에 출간된 Elisabeth Tova Bailey의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달팽이의 관찰과 이를 통한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다루는 미국 자연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작가는 유럽 여행 중에 걸린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의해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에 걸리고 자율신경계에 결함이 생겨 20여 년 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기만 했다. 특히나 그 질병은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완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다가도 갑자기 상태를 악화시켜 깊은 실망감을 겪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 절망적인 삶의 고통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은 어느 날 지인이 가져다준 달팽이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A petal started to disappear at a barely discernible rate. I listened carefully. I could hear it eating. The sound was of someone very small munching celery continuously. I watched, transfixed, as over the course of an hour the snail meticulously ate an entire purple petal for dinner.
 The tiny, intimate sound of the snail's eating gave me a distinct feeling of companionship and shared space.
 꽃잎 하나가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자 달팽이가 먹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끊임없이 누군가 셀러리를 조금씩 아삭아삭 씹는 소리였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달팽이가 저녁으로 보라색 꽃잎 하나를 세심하게 먹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달팽이가 먹을 때 나는 작고 친근한 소리는 나에게 동료애와 공간을 공유한다는 특별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Snail, 12-13)


 『Refuge』에서 마지막 장을 제외한 모든 장의 제목은 그레이트 솔트 호에 이주해 오는 다양한 철새의 이름이며 각 장은 그 철새와 연관된 큰 범주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런 수평적으로 확산된 방식의 관찰과는 반대로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은 달팽이라는 하찮은 존재의 아주 작지만 광대한 소우주(microcosmos)를 관찰하는, 수직적으로 몰입하는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고 있다. 조금 잔인한 평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작가가 유일하게 몰두할 수 있는 행위가 달팽이 관찰이었다는 상황이 집중성과 진정성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선물이라는 비평도 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작가는 생명애(Biophilia)에 바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버드대학교 생물학자인 Edward O. Wilson이 1984년에 출간한 『Biophilia』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인간을 칭송하는 이유는 다른 생물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른 생물을 관찰하고 앎으로서 생명이란 개념의 가치를 격상시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Humanity is exalted not because we are so far above other living creatures, but because knowing them well elevates the very concept of life (159)". 이 문구는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 전체를 관통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달팽이를 관찰하면서 작가는 달팽이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둘이 겪은 환경의 변화가 등치 되는데, 작가는 원치 않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원래 살고 있던 시골집에서 삭막한 도시 아파트로 이동하게 되었고, 달팽이 역시 인간에 의해 자신이 살던 숲에서 낯선 작가의 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The snail and I were both living in altered landscapes not of our choosing; I figured we shared a sense of loss and displacement.
 달팽이와 나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바뀐 전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상실과 이동의 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Snail, 20)


 The original snail and I had been fellow captives, but now we had both returned to our natural habitats. As I tried to make my life livable within a few rooms of my house, I wondered how the snail was coping in its native woods. 
 원래의 달팽이와 나는 포로동료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둘 다 원래 거주하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나의 집에서 적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달팽이 역시 숲에서 어떻게 잘 헤쳐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Snail, 145)


 그러나 달팽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다양한 전문서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작가는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이 작가 자신의 무기력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끈질기고 망설임 없이 주변을 탐구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처럼 아침에 눈을 뜰 때 몸이 회복되어 있을 거라는 등의 헛된 희망을 꾸지 않고, 충실한 움직임으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쳐 나아간다. 또한, 점액을 이용해 중력에 방해받지 않고 다양한 표면 위를 이동할 수 있으며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이나 ‘동개(冬蓋)’를 만들어 여름잠과 겨울잠을 자며 바깥 온도 변화에 적응한다는 점 등, 인간종과 비교했을 때 훌륭한 생물학적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As the snail's world grew more familiar, my own human world became less so; my species was so large, so rushed, and so confusing. I found myself preoccupied with the energy level of my visitors, and I started to observe them in the same detail with which I observed the snail.
 달팽이의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인간세계는 더 작아졌다. 인간은 아주 크고, 성급하며,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는 스스로가 방문객들의 활동에 몰두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달팽이를 관찰할 때와 같은 정도의 세밀함으로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Snail, 27)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작가는 침대에 누운 채로 큰 노력을 들여 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굴렸다. 그 조그만 시각의 변화만으로 완전히 바뀐 전경을 볼 수 있게 되는 새로움에 설렘을 느끼게 된다. 관점의 전환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서 탈피한 작가는 인간의 행동을 좀 더 객관화된 시각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더불어 작가의 관찰은 달팽이와 관련된 생물학적, 사회학적 지식 등을 다방면으로 탐구하는 것으로 깊이를 더해간다. 3부 ‘병렬(Juxtaposition)’과 4부 ‘문화생활(The Cultural Life)’, 그리고 5부 ‘사랑과 신비(Love and Mystery)’ 부분에서 생물학자, 문학가 등이 쓴 다양한 글을 인용하며 달팽이종과 인간종의 생물학적 특징을 비교·대조한다. 책의 참조 부분에 나오는 많은 전문서적과 논문들은 작가의 끈질긴 노력과 몰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달팽이 관찰이 계속되면서 달팽이는 작가 자신이 생존의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삶의 목적을 부여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달팽이가 알을 더 낳기 위해 작가의 시야에서 잠깐 동안 사라지는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질병 → 격리 → 사라짐 → 망각”의 과정을 거쳐 사회로부터 잊힌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달팽이와 함께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작가는 고립과 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달팽이의 상실은 작가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준다. 다행히 달팽이는 곧 발견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었다.


  I could never have guessed what would get me through this past year - a woodland snail and its offspring; I honestly don't think I would have made it otherwise. Watching another creature go about its life... somehow gave me, the watcher, purpose too.
 나는 무엇이 이 지나간 시간 동안 내가 버틸 수 있게 해 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바로 숲달팽이와 그의 자손들이었습니다. 다른 식이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생물이 자신의 삶을 헤쳐 나아가는 것을 관찰하는 행위는 관찰자인 나에게도 어떤 목표를 주었습니다. (Snail, 154)
 The snail had been a true mentor; its tiny existence had sustained me.
 달팽이는 진정한 멘토였습니다. 그 작은 존재가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Snail, 160) 


 달팽이를 관찰하는 행위와 그 관찰 속에서 발견한 소우주는 작가의 절망적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미시적 자연에 몰두하고 깊이 있게 관찰함으로써 작가는 육체적으로도 건강이 상당히 회복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Ⅳ. 인간 상상력의 모순과 자연 속에서의 치유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종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를 지속시키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생존과 번식을 반복하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이다(Dawkins, 2006). 대개의 경우, 생물 개체의 생존 가능성이 유전자가 지속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개체의 생존 가능성은 주어진 상황과 불완전한 정보를 얼마나 잘 학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얼마나 좋은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 방법 한 가지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 때 발생할 상황을 ‘모의실험(simulation)’해보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체계에서 이러한 모의실험은 ‘상상력(imagination)'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상상력을 이용하여 어떤 행동과 그 결정의 결과를 예측함으로, 인류는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상상력의 발현을 통해 인간은 언어를 발달시켜 지식을 축적하고 문명을 번영시킬 수 있었다(Harari, 2011). 특히, 언어와 문자의 발달은 눈앞에 관찰하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상황을 창조하고, 지식을 축적하여 후대에 전달할 수 있게 하여 인류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더불어, 집단적인 상상력의 공유는 서로 알지 못하는 타인과의 협업을 가능하게 하여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유지시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상력은 신화, 전설 등 문화와 예술의 발달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상상력이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류는 미래에 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상상력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달시켰고 기술혁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하지만 본고의 첫 장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적 인류 문명의 발달은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현재 인류가 번영한 만큼 자연은 훼손되었다. 모순적이게도, 미래에 대한 인류의 불안과 공포심으로 인해 문명이 발전하였는데 그 발달이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에게 또 다른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져다주게 된 것이다.


 『Refuge』에서 어머니는 자신이 처음 암 선고를 받았던 때를 회상하며 가능한 매일의 삶을 풍성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오직 완벽하게 현재에 몰두할 때에만이 스스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작가가 어머니에게 Wendell Berry의 시를 읽어 줄 때 다시 한번 강조된다.    

                 

...

I come into the peace of wild things                          나는 스스로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who do not tax their lives for forethought                야생의 것들의 평화를 물려받는다.

of grief. I come into the presence of still water.       나는 고요한 물의 실존을 물려받는다.

And I feel above me the day-blind stars                    나는 낮 동안 햇빛에 가려 빛나기를 기다리는 별이

waiting with their light. For a time                             나의 위에 떠있음을 느낀다.

I rest in the grace of the world, and am free.           세상의 은혜 속에 누울 때, 나는 자유롭다.

(Refuge, 215)


 자연 속에서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자연과 합일됨을 느낄 때 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고요한 물의 실존(the presence of still water)’이란 구절에서 삶의 작은 변화는 고요하고 거대한 자연의 순환과정 속 일부일 뿐이므로 죽음이나 고통, 미래의 두려움 따위에 동요하지 말기를 강조한다.                     

 Survival often depends on a specific focus: a relationship, a believe, or a hope balanced on the edge of possibility. Or something more ephemeral: the way the sun passes through the hard, seemingly impenetrable glass of a window and warms the blanket, or how the wind, invisible but for its wake, is so loud one can hear it through the insulated walls of a house.
 생존이란 종종 관계, 믿음, 혹은 가능성의 가장자리에서 균형 잡힌 희망과 같은 특별한 초점에 의존한다. 또는 햇살이 투과할 수 없어 보이는 단단한 창문을 뚫고 들어와 담요를 따뜻하게 덥히는 방식이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집의 절연 처리가 된 벽을 통해 들리는 큰 소리의 바람과 같은, 더 덧없는 것들에 의존하기도 한다. (Snail, 15)


 또한,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에서는 생존이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빚어진 관계, 믿음, 희망 같은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순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에 충실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따스한 햇살이나 거센 바람 같은 자연 속에서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치유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전제 위에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이는, 영어단어 landscape의 의미가 푸에블로 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경의 의미를 표현하는데 부족하다는 Silko(1996)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영어에서 전경(landscape)이라는 어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면, 푸에블로 인들이 생각하는 전경(landscape)이란 바라보는 자가 그 속에 포함되어 생물과 사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자연과 독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의 다양한 생물, 무생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 위에서 두 작품의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진정한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표현적 자아(expressive ego)’를 찾아간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진정한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관찰하고 재인식하며 대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투적인 것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을 언어로 표현하여 자신만의 고유하고 중요한 시간으로 만드는 행위가 ‘치유’라고 할 수 있다. Terry Tempest Williams는 그레이트 솔토 호의 수위상승에 따른 철새서식지의 파괴와 어머니의 암 투병을, Elisabeth Tova Bailey는 자그마한 달팽이의 소우주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글로 써나가며 ‘표현적 자아’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치유적 글쓰기(전세재, 2014)는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사고를 재구성하여 물리적으로 나타내는 표상(representation)에 불과하기 때문에,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상의 일부만을 불완전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또다시 상상력이 개입하게 된다. 글쓴이와 독자는 불완전하게 구성된 텍스트를 통해 소통하게 되는데 그 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상상력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장 적절한 표현과 방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독자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글 속에서 숨겨진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결국, 상상력이란 인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근대성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상처 입은 인간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Ⅴ. 나오며


 본고는 Terry Tempest Williams의 『Refuge』와 Elisabeth Tova Bailey의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을 중심으로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속에서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할 표현적 자아에 대해 다뤘다. 자연과의 공존을 전제로 하여, 부단한 노력으로 세심하게 관찰하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은 환경훼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수 있게 되고 스스로의 상실감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모순된 영향에 대해 고찰하며, 현대사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상상력이지만 그 치유의 과정을 완성시킬 수 있는 힘도 상상력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인 망을 형성해야 한다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사고는 인간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자연 속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공존(coexistence)하고 연대하여 서로 공진화(coevolution)를 할 수 있는 미래야말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그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Refuge』와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과 같은 작품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자연과의 공존에 대해 구체적인 경험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며 깊이 있게 공감할 수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작품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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