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의 치유와 인간의 상상력에 대하여
한 6년쯤 전, 대학원에서 인지(cognition)라던가 언어학 같은 골치 아프고 무미건조한 수업들 속에서 유일하게 감성을 건드려준 수업이 있었다. 미국문학 속에서의 자연주의에 관한 깊이 있는 수업이었고 이 부족한 글은 그때 썼던 몇 안 되는 서평 중 하나이다.
Ⅰ. 들어가며
후기산업사회가 고도화되고 생산과 소비가 극단적으로 커지면서 환경문제는 날로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다양한 차원에서 미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자연기 문학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신문수, 2005). 아이들의 정신적 질환과 소외현상을 ‘자연결핍장애’라 칭하며 다양한 개인적, 사회적 활동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활동가들도 늘었다(Richard Rouv, 2005). 또한, 195개국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채결하는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탈 원전 정책으로 돌아선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대체에너지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연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도시 근교에 올레길, 둘레길 등을 건설하고 자연공원을 재정비하는 등, 많은 국가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환경파괴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상의 기저에는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문명과 도시 발달이 편의와 안락함을 가져다준다는 긍정적인 인식에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성을 훼손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윤리와 교육, 의학과 같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가치중심적 개념들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화폐로 정량화되어 거래되고 있다(Sandel, 2012).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같은 IT 기술의 발달은 사이버 세계에서의 피상적 관계 맺기를 증가시켰고, 그만큼 현실세계 속 인간관계는 단절시켰다. 현대인들이 이런 문제의 원인인 근대성에 대해 불안감과 공포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파괴된 자연과 훼손된 인간성을 ‘치유’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치유(healing)’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holos(whole, 전체의)에서 유래하였고, 고대영어 hǣlan은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킨다(restore to sound health)’는 뜻을 가진다. 반면에 ‘치료’는 어원적으로 라틴어의 curare에서 유래하였고, ‘돌보다(take care of)’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치유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래서 ‘치료’는 의학을 통해 질병이나 상처를 고치는 의미가 큰 반면, ‘치유’는 정신적, 육체적 불완전한 상태를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화를 이루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이는 인간성의 황폐화를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근대성에 의해 불안감과 두려움, 공포감과 같은 불완전한 상태를 ‘치유’ 해야만 한다.
본고에서는 Terry Tempest Williams의 『Refuge』와 Elisabeth Tova Bailey의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을 중심으로,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전제로,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이를 통해 표현적 자아(expressive ego)를 확립함으로써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Ⅱ. 『Refuge』에서 삶과 죽음
1991년에 출간된 Terry Tempest Williams의 『Refuge』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기록을 통해 작가 본인의 내면적 성찰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미국 자연기(nature writing)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신문수, 2005). 다만, 다른 미국 자연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일반적인 자연기 작가들이 남성적 시각을 통해 황야에 홀로 서서(alone in the wilderness) 자연을 관찰하는 반면, 『Refuge』에서는 작가가 공동체적 활동(communal project)으로서 가족, 친지, 동료들과 함께 자연을 대면한다. 이는, 세 모녀가 조류탐사(birding ritual)를 하는 모습이나 남편, 혹은 친구와 함께 철새서식지(Bear River Migratory Bird Refuge)를 찾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I could not separate the Bird Refuge from my family. Devastation respects no boundaries. The landscape of my childhood and the landscape of my family, the two things I had always regarded as bedrock, were now subject to change Quicksand.
나는 철새서식지를 나의 가족과 분리시킬 수 없었다. 파괴는 경계가 없다. 내 어린 시절의 전경과 내 가족의 전경, 내가 항상 나의 기반암으로 여긴 이 두 가지는 이제 무너질 처지에 놓였다. (Refuge, 40)
또한, 이 글은 두 가지 큰 사건을 병치시킨 더블 플롯(double plot) 형태를 띠고 있다. 하나는 그레이트 솔트 호(Great Salt Lake)의 수위상승으로 인한 철새서식지 파괴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암 재발과 투병이다. 언뜻 보기에 관련 없는 이 두 사건은 작가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암(bedrock)으로서 연결된다(전세재, 2014). 특히나, 그레이트 솔트 호 수위 상승과 어머니의 암 발병이 모두 인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은 두 플롯의 병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레이트 솔트 호는 주변 강물의 유입과 물과 햇빛에 의한 수분의 증발이 동시에 발생하며 기후변화에 따라 수위가 오르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호수 중앙을 가르는 인간이 건설한 큰 둑길(Causeway)에 의해 호수의 남, 북단의 수위 차가 발생한 것이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호수 범람의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작가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사막에서 본 큰 섬광이 미국 정부에서 한 지하 핵실험이었고 그 핵폭탄의 낙진이 작가의 가족을 포함한 지역의 수많은 여성들을 암에 걸리게 만든 원인으로 밝혀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글의 후반부에서 작가가 에코페미니스트로서 ‘한쪽 가슴을 가진 여인들의 일족(The Clan of One-Breasted Women)’을 통해 핵실험 반대운동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Refuge』에서 작가는 어머니의 암 투병을 통해 삶과 죽음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작가의 어머니가 암이 재발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나서 처음 한 행동은 가족들에게 알리고 검사를 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콜로라도강 유역을 여행한 것이었다. 그 여행의 '고독(solitude)' 속에서 어머니는 암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I needed time to live with it, to think about it..."
"나는 그것(암)과 함께 살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Refuge, 40)
I know the solitude my mother speaks of. It is what sustains me and protects me from my mind. It renders me fully present. I am desert. I am mountains. I am Great Salt Lake... I am less afraid of death. We are no more and no less than the life that surrounds us. My fear surface in my isolation. My serenity surfaces in my solitude.
나는 나의 어머니가 말 한 고독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고,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다. 또한, 고독은 나를 완전히 현재에 몰입하게 한다. 나는 사막이고 산이다. 그리고 나는 그레이트 솔트 호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의 두려움은 고립 속에서 자라난다. 나의 평온은 고독에서 나타난다. (Refuge, 29)
서양과 동양의 의학에서 질병에 대한 시각은 큰 차이를 보인다. 서양의학에서 질병은 몸을 해하는, 그래서 격리되고 제거되어야 할 이물질로 여겨지는 반면, 동양에서는 질병을 치료하고 다스려야 하는 몸의 일부로 본다. 작가의 어머니가 깨달은 사실은 질병을 떼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는 동양적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자연에 둘러싸인 고독(solitude)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Henry David Thoreau는 그의 대표작 『Walden』 5장 Solitude에서 자연 속에서 홀로 있는 상태는 자연과 더불어 동료애(companionship)를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심지어 한밤중에 홀로 자연에 있을지라도 두렵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고독한 상태(solitude)는 동료애 없이 배제되고 격리된(isolation) 상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어머니의 깨달음을 죽음이 삶의 대척점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안고 살아가야 하는 관념으로 확장시킨다. 죽음은 세상 속에서 배제되고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 과정(cyclicity)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In the dark of the moon there is growth. Plants do not flourish in the noonday sun, but rather in the privacy of the new moon... A wedge of long-billed curlews flying in the night punctuates the silences and their unexpected calls remind us the only thing we can expect is change.
달의 어둠 속에 성장이 있다. 식물들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현달의 은밀함 속에서 자라난다... 한밤중에 긴부리마도요새의 쐐기는 침묵을 찌르고 그들의 예상치 못한 외침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변화라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킨다. (Refuge, 146)
달의 몰락과 차오름 속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변화일 뿐이라는 생명의 순환성에 대한 비유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인간적 상실감을 덜어준다. 이런 시각은 고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번영했던 푸에블로 인(Pueblo native American)의 자연관과 맞닿아있다. 푸에블로 인들의 독특한 장례문화는 죽음이 자연의 순환 속 일부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Silko, 1996). 그들은 시신을 거주지 내의 사용하지 않는 방에 얕게 묻어 시신의 모든 부분이 다른 동, 식물, 혹은 박테리아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그 시신은 먼지가 되어 다시 창조자 어머니(Mother Creator)의 품 안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믿었다.
작가는 멕시코의 Tepotzlán 마을시장에서 마리골드(marigold) 꽃을 보고, 마을주민의 의식에 참여하며 어머니를 추억한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의 신체적 죽음은 한 생명의 끝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공존하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I feel joy. I feel love. l feel her love for me, for all of us, for her life and her birth, the rebirth of her soul... 7:56 P.M. I stood by Brooke. I felt as though I had been midwife to my mother's birth.
나는 환희와 사랑을 느꼈다. 어머니의 나와 우리 모두, 그리고 그녀의 삶과 탄생, 영혼의 부활에 대한 사랑을... 저녁 7:56에 나는 Brooke 옆에 섰다. 나는 마치 어머니의 탄생을 돕는 산파였다고 느꼈다. (Refuge, 231-232)
또한,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헌신적으로 병간호를 하는 가족 구성원들을 성스럽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산파로서 어머니의 새로운 탄생을 돕는다는 달관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어머니의 임종장면을 회상(flashback)으로 기술한 방식은 거리 두기를 통해 자신의 슬픔과 고통, 체념, 달관의 감정을 좀 더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하고자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한 ‘치유’ 과정은 어머니가 걸린 암의 과학적 원인이 밝혀지게 되면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운동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장인 ‘한쪽 가슴을 가진 여인들의 일족(The Clan of One-Breasted Women)’에서 그녀는 미국 정부가 유타 주에서 실시하던 핵실험을 반대하는 환경운동에 참여한다. 여성이 출산 중에 겪는 고통은 생명을 잉태하지만, 핵실험은 자연에 고통만을 줄 뿐이고 거기서 잉태되는 것은 사산된 핵폭탄뿐이라고 경고하며 사회적 차원의 치유를 실천하기에 이른다. 새벽에 다른 여성들과 함께 핵실험 통제구역에 들어가 비폭력 시위를 하던 중, 그녀는 군인에게 잡혀 소지품 검사를 당한다. 가지고 들어온 종이와 펜을 보고 군인이 왜 가지고 들어왔는지를 물었을 때, 작가는 ‘무기(Weapons)’라고 답하면서 미소 짓는다. 이렇게 마지막을 글의 첫 부분과 순환시키면서 작가는 이 글을 기록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Perhaps, I am telling this story in an attempt to heal myself, to confront what I do not know, to create a path for myself with the idea that "memory is the only way home."
I have been in retreat. This story is my return.
아마도 나는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직시하고자, 그리고 “기억이 귀향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자 이 글을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피정을 떠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귀환이다. (Refuge,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