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 보면 떠오르는 생각들.
요즘 저녁에만 달리다 이번 토요일 오랜만에 아침에 달렸다. 저녁 달리기는 칠흑 같은 천 표면에 넘실넘실 비치는 가로등 빛, 아파트 불빛 같은 것을 좇으며 좁은 세상 속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둘러싸여 달린다. 아침 달리기의 세상은 좀 다르다. 옅은 안개에 둘러싸인 불투명한 시야지만 그래도 훨씬 멀리까지 다다르고 정겨운 억새와 새들의 웅성거림 사이를 달린다. 평소보다 얼굴이 차가웠다. 동남쪽의 구름 낀 하늘 아래 주황의 햇살이 천의 산책로 가를 따라 세워진 방음벽 위로 서서히 비쳤다.
견갑골의 통증과 차가운 날씨로 약간은 경직된 어깨와 좁은 보폭으로 달렸다. 어제저녁 피곤에 절어 아이에게 차갑게 굴었던 스스로를 타박하고 질타했다. 다행히 달리기 하러 나오기 전 깬 아이에게 사과하고 안아주고 토스트기로 구운 식빵을 줬으니 후회는 조금 덜은 걸까? 호흡이 가빠오진 않았지만 평소보다 무거운 발걸음이다.
8월 말부터 다시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 세 달이 되어 간다. 일주일에 적게는 이틀, 많게는 나흘 정도 달리고 있다. 벨트를 찰 때 한 칸 안쪽으로 줄여 차게 되었고 평소 호흡의 불만족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부터 냄새에 좀 더 민감해졌다. 특히 달리는 중에는 하천의 비린내나 풀과 꽃 향기 또는 도로가의 매연 냄새 같은 것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달릴 때에는 도봉로 쪽 하천 가를 달리다 매캐한 타는 냄새와 쓰레기 냄새가 뒤섞인 구간이 있었다. 되돌아오며 그곳을 지날 때 같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마 둑방 위 아파트 단지 쓰레기장에서 나는 냄새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달리는 어느 순간 후각, 미각, 시각, 촉감, 청각과 같은 오감 말고도 다른 감각이 역시 선명해진 거 같았다. 아마 미세하게 기울어진 오르막길에서 느껴지는 하체 힘의 부침 때문이었으리라. 평형감각. 기울어짐과 균형감 역시도 좀 더 미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중력이 있고 귀 속에 반고리관 같은 기관이 있어 우리는 몸이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는지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넘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발을 디딜 때 발에 닿는 땅의 미세한 기울기와 울퉁불퉁함을 느끼고 매 발걸음 적절히 균형을 잡으며 착지한다. 오르막길에서는 평지보다 허벅지와 종아리, 엉덩이 근육에 좀 더 힘을 주게 되고, 내리막길에서는 보폭이 커지고 속도가 빨라진다. 작은 돌부리를 밟거나 길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디딜 때도 걸리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의 균형을 잡는다. 그렇게 무사히 달리기를 끝마치는 평범한 일상은 끊임없이 균형을 잡으려는 감각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진실은 복잡하다. 누군가 세상의 원리에 대해 단 하나의 수식이나 문장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그건 아마 신이거나 사기꾼일 것이다. 그 탁월한 아인슈타인도 거시세계의 원리와 미시 세계의 원리를 하나로 합칠 대통일장 이론을 결국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때론 단순한 문장이 많은 것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아니, 적어도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는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말하자면, “한 인간의 균형감은 오직 몸을 올곧게 하는데만 쓰이지 않는다.” 창작을 할 때도, 타인과 관계 맺음을 할 때도, 어떤 일을 할 때도, 균형감은 필요하다.
요즘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가지는 고민 중 하나는 스스로 쓰고 싶어 하는 글을 써야 하는지, 남이 읽고 싶은 글을 써야 하는지이다.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글로 드러냄은 결국 남에게 읽히고자 함이며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감을 잡기는 쉽지 않다. 내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 타인의 생각과 욕망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 육체의 장벽, 이런 것들이 그 균형감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 예전에 알고 지낸 음악을 업으로 하던 기타 선생님은 밴드의 곡을 쓰면서 대중의 니즈와 밴드원들의 욕구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도 있다. 같은 고민이었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도 균형감을 찾는 건 중요하고 또 어렵다. 예를 들어, 교사와 학생이 관계를 형성할 때, 친구처럼 가까워지면 교사로서의 권위가 위태롭고 결국 교수학습의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반대로 교사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학생을 밀어내면 이 또한 제대로 라포와 신뢰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친구 관계에서 나 자신을 너무 드러내고 스스로만을 챙긴다면 친구는 떠나고 고립될 수 있다. 혹은 친구의 만족을 위해서만 관계를 맺는다면 오히려 지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일은 어떠한가. 성취만을 좇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결국 도박을 하는 행위랑 별다를 것 없이 선을 넘을 수도 있다. 과도하게 실패를 두려워하고 안전을 강조하면 일은 진척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흰 광대복을 입고 부채를 들어 외줄에서 한 발로 흔들흔들 균형을 잡는 줄꾼, 혹은 줄광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매일, 매 순간 매 순간, 수많은 외줄에서 위태위태하게 버티며 앞으로 나가니 말이다.
줄꾼의 한순간의 방심으로 2~3미터 바닥으로 떨어져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수도 있다. 차를 운전할 때, 안전과 속도 사이의 균형감을 잃으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영화 ’조커‘에서 그의 균형을 무너뜨려 최악의 빌런으로 탄생시킨 것은 작은 총 한 자루였다.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만 기울어도 세상엔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잘못하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사히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이다.
아. 위에서 진실은 복잡하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균형감 하나가 세상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균형감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일도 충분히 많다. 아이를 보는 부모의 내리사랑은 손익을 따지지 않고 마음 편히 주기만 하면 된다. 아우. 참 식상하다. 뭐 어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