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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Nov 06. 2023

아들아, 정치 만은 하지 마!

내가 정치를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우리 고모부는 사촌 동생들이 사춘기가 될 무렵 출가하셔 작은 절의 주지스님이시다. 대학에 간 이후로 매년 명절 때 인사드리면 사회나 정치 이야기를 자주 꺼내시고 내 의견을 물어보셨다. 나름 서울 물 먹고 있는 놈이라고 인정해 주시니 감사드리지만,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질문을 받거나 내 생각과 동떨어진 말씀을 하실 땐 곤욕스럽다.


얼마 전 추석 연휴에도 아내와 아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절에 인사드리러 갔다. 역시나 정치 얘기를 하시다 어느 순간 10.29 참사 이야기를 꺼내셨다. 고모와 함께 말씀하시길 “걔네들은 왜 하필 이상한데 놀러 가서 그런 일을 겪었냐. 간 젊은이들도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순간 울컥한 나는 그게 아니라고 세게 말하려 했으나 이미 모든 걸 관망하던 동생이 나를 제지했다. 오랜 경험으로 더 이상 이 주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수적인 지역에서도 그래도 상당히 나와 정치나 사회를 보는 시각이 비슷한 분이었으나 그래도 속하는 세대가 달라서 인가. 이렇게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나는 보수의 텃밭이라 불리는 경북의,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 색이 짙을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자랐다. 어린 시절 정치에는 전.혀. 1도 관심이 없었다. 간혹 산을 오르다 대혜폭포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보았다. 국민학교 운동장 조회를 하면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와 민족의 무궁한…”이라는 문구를 별생각 없이 들었으며 뉴스는 거의 쳐다도 보지 않았다. 1992년 대선이 치러지던 어느 날, 밤을 새워 개표방송을 보면서 김영삼의 당선을 응원하시던 아버지의 흐릿한 뒷모습 정도가 내가 접한 정치의 거의 유일한 단면이었다.


대학교 1학년이 되면서 당시 거의 사라져 가던 학생 운동의 잔류가 남은 학생회를 옆에서 살짝 겪었다. 영화 ‘1987’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적인 정치적 각성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내가 머물렀던 우물 밖의 더 큰 세계에서 사회와 정치가 돌아가는 모습을 아주 조금 엿보았다. 오히려 그때 만난 동기 녀석들 중에 서울에서 공교육을 받은 아이들에게서 받은 문화 충격이 더 컸었다. 그들은 국회의원 누가 어떻고, 어떤 정당이 어떻고, 우리나라 사회운동이 어떻고 등등 잘 모르는 정치 이야기를 능숙하게 하였다. 같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수능에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허덕였던, 그래서 독서도 별로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관심도 없던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동경했었다. 저런 화제를 자연스럽게 말하던 녀석들이 지적으로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 출신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녀석들이었다. 아직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감탄하고 있는 놈들이다.


한겨레 신문을 조금씩 읽어 보았다. 당시에 막 넘쳐흐르기 시작하던 인터넷 신문이나 정치 비평 게시글, 정치 패러디 따위를 접하기도 하였다. 대학 등록금 투쟁이라며 한 두 번 선배와 친구들을 따라 나가보기도 하였다.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득 모여 가지게 되는 희열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아. 연세대 멋있다. 깃발들 촌스럽다. 그 정도였다. 나의 사고와 시각은 그다지 크게 확장하지 않았고 정치는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세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입대 전 한 과선배를 통해 거시경제학을 접하였다. 친한 친구 한 놈이 경제학과에서 공부를 하여 그와 개론서를 가지고 토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얼떨결에 유시민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경제학 카페’ 서문에 있던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학생식당 밥을 남기는 ‘합리적 경제인’ 친구를 타이르다 논리로 두드려 맞는 불쌍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경제학을 전공하였지만 자신의 전공보다는 정치의 세계에 깊게 속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전역을 하고 나서도 난 사리분별이 안되었다. 17대 대선 전에 학원 알바를 할 때, 함께 담배를 피우던 학원 원장이 사대강 되면 요트 하나 살 수 있게 (인지도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다단계 사업을 열심히 해야겠다며 희망에 찬 이야기를 했다. 난 그때 사대강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 영웅시대로 유명한 이명박 후보는 찍기 싫었고 그렇다고 다른 후보가 누군지도 잘 몰랐다. 결국 나의 첫 대선 표는 허경영 후보에게 갔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복학을 하고 얼마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동기 녀석과 똑똑한 후배 하나와 함께 추모식에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그 동기 녀석은 노통이 생전에 즐기던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추모장에 올려놓았다. 집에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추모영상이나 대통령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 관련 사건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았다. 왜 그런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대학교 1학년 때 대선은 아예 기억에도 없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임기 말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육로로 이동하며 38선을 직접 건너는 모습 정도의 기억이 다였는데. 정치에 무관심했던 자신에 대한 책망인가? 그에 대한 미안함이었나? 그가 부른 상록수를 들으며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다.


그때부터 그가 임기 후에 출판한 책들이라던가 유시민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모이면 정치 이야기도 많이 했다. 누가 잘못했다느니, 무엇이 옳지 못하다느니. 특히, 골방에서 시작해 큰 이슈몰이를 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햇병아리도 안 되는 녀석이 그깟 진보적인 신문이나 글, 방송 좀 보았다고 아버지께 대든 것이다. 아직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던 단순한 어린아이였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착한 놈, 반대편은 나쁜 놈. 스스로에게 유리한 이야기만을 탐닉하던 확증편향에 찌든 거였다. 그런데다 전역 후 뭔가 견뎠다는 오롯한 자신감이 한몫했으리라.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와는 항상 정치적인 언쟁으로 대화를 채웠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여도 아버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설득을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고집이 세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때 언뜻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세상은 다양한 차원으로 채워져 있고 내가 아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쉽게, 혹은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고 하여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 실제로 진실은 복잡하고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과의 사슬로 뒤엉켜 있다. 또한, 감성이 이성을 앞선다. 애초에 본인의 선호는 정해져 있고 이성은 그에 대한 합리화, 변명, 핑계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인간의 생각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20대 초반 백지인 나의 생각에 우연히 진보적인 정치적 견해가 담긴 것뿐이다. 물론 나는 내가 믿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부로 남의 주장을 틀렸다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버지와의 수많은 언쟁 속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2012년 18대 대선 결과는 충격이었다. 노통 추모를 함께 갔던 후배는 우리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말했다. 나를 둘러싼 책, 방송,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나와 견해를 공유하는 이들을 한가득 보아왔으나, 그 대선 결과는 아직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탄핵을 거치고 두 번의 대선을 더 지켜보며 여전히 나는 소수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께 대들던 날카로움은 많이 무뎌진 듯하다. 이제 가끔 고무부와 대화할 때나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를 제외하곤 정치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분명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떠든다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떠드는 주장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님을. 내편이 ‘선,’ 상대편이 ‘악’이지 않다. 지금까지 내내 나의 정치적 관심은 아주 제한적이었으며 이제는 그마저 더 좁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찌들어가는 건가 슬프기도 하지만, 현실이 너무 막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조금 더 나아질 거라 믿고 투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This too shall p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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