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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Nov 07. 2023

오늘의 밤 달리기.

3인칭으로 쓰는 에세이.


그는 스마트폰을 열어 날씨 앱을 실행한다. 영상 5도. 어제 비가 오고 나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내에게 달리기를 하러 가겠다고 말하고 큰 방 서랍장에서 타이즈를 꺼냈다. 아내는 눈을 흘겼다. 아이는 달리기를 하지 말고 엄마 아빠와 함께 자자고 한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두 사람을 달랜다. 타이즈와 검은 츄리닝 바지를 입는다. 흰 반팔티 위에 아버지께서 주신 중년스러운 스웨터를 입고 얇은 잠바, 그리고 검은 집업후드로 몸을 감싼다. 손수건 하나는 목에 걸고 다른 하나는 왼손에 묵는다. 코로 호흡하며 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콧물을 닦아야 해서 항상 챙긴다. 조깅화를 신고 여전히 눈을 흘기는 아내와 빠이빠이 하는 아이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아파트 현관 앞 시계는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현관문을 나오니 역시나 공기가 차다. 한동안 달리기 좋은 날씨였는데, 다시 혹독한 계절이 찾아오고 있다. 후드를 올리고 줄을 조여 목에 맨다. 방한은 어느 정도 되는 듯하다. 적당히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불편한 오른쪽 견갑골에 신경 써서 팔을 올려 어깨와 등을 주욱 편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몇 번 하고 손목과 발목을 털고 돌린다. 다리 한쪽을 주욱 펴고 앉아 허벅지를 스트레칭해준다. 적당히 워밍업을 마치고 천천히 단지 안을 달린다. 인도를 달리고 주차된 차들을 지나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함께 있는 단지 끝 공원에 도착했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 동부간선 위를 지난다. 다리 양 쪽에는 구에서 꾸민 꽃이 가득하다. 이 시간이면 꽃에 물을 주어서인지 다리 양 쪽 바닥이 항상 젖어있다.


천 이쪽은 그가 사는 N구, 천 저쪽은 예전에 그가 살았던 D구에 속한다. 다른 구에 속한 천의 이쪽과 저쪽의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주변은 다른 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 옆에 초록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운동장에선 백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구령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고 있다. 그는 전광판에서 시계를 확인한다. 8시 51분. 천의 남쪽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손수건을 동여맨 왼손은 괜찮았으나 오른손은 바람에 꽤 시렸다. 얕은 내리막길을 지난다. 마주치며 달리는 남자의 호흡이 차게 들렸다. 아래로 아래로 대략 600미터 정도 내려가면 4차선 도로가 깔린 다리가 나온다. 그가 출근길에 간혹 지나는 다리다. 산책로에서 약 30미터 정도 옆 경사로를 올라 다리를 건넌다. 계단을 타고 천 저쪽의 D구에 속한 산책로로 내려온다.


이제는 위로 위로 뛴다. 천 저쪽 보다 사람이 많다. 산책로는 때로 넓어졌다 좁아졌다 한다. 가끔 맞은편에서 걷거나 뛰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때로는 오른쪽으로 펼쳐진 칠흑의 천의 물결 위로 일렁이는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을 본다. 간혹 “당신은 오늘이 가장 아름답다”같은 문구가 예쁘게 꾸며진 장식판도 있다. 역시나 얕은 오르막을 오르고 다시 평지를 달린다. 지난번엔 이 구간에서 페이스를 꽤나 올렸다. 그 덕에 달리기가 끝나고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훈련병 5주 차 각개전투 후에 생겼던 구토감을 비슷하게 느꼈었다. 오늘은 적당히 뛰기로 그는 마음먹었다. 옷을 껴입어 몸은 좀 더 무겁고 하체에 오랜만에 닿는 타이즈의 촉감은 어색했다. 그러나 걸음은 이전보다 가볍다. 3주를 넘긴 견갑골 통증이 잦아드는 기미를 보인다. 후드를 뒤집어쓴 머리와 목이 살짝 뻣뻣하지만 괜찮은 컨디션이다. 호흡은 안정적이다. 몇 번 코를 풀었다. 비가 와 맑은 밤하늘이다. 짙은 남청색의 하늘은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어느새 천 맞은편으로 멀리 처음 출발한 계단이 보인다. 조금 더 가니 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도 지난다. 이제 2킬로미터 정도 달렸나. 그는 왼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조금 축축해진 주먹에 차가운 오른손으로 옮겨 쥔다. 의식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어왔다 나간다. 이전 학교에서의 가혹했던 초임시절에 관해 쓰고 싶다. 저 사람은 입으로 호흡하며 달리는구나. 깊이에의 강요에 대한 글도 쓰려한다. 누구는 벌써 패딩을 입었구나. 하긴 그만큼 추운 날씨다. 소설도 써야 한다. 왼쪽 발목이 살짝 시큼하지만 괜찮다.


왼쪽으로 기하학적인 모형들이 세워져 있는 놀이터를 지난다. 그리고 곧 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저기 멀리 교회 전광판에 ‘하느님의’ 어쩌고 문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앞에 걷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얼마나 가장자리에 있는지 보고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피해 앞지른다. 맞은편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더 긴장한다. 그는 겁이 많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처음 건넌 다리보다 북쪽에 또 다른 4차선 도로가 깔린 다리를 지난다. 처음 천을 달릴 때는 여기서 멈췄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지나쳐 다시 작은 언덕을 오르내려 더 북쪽으로 뛴다. 조금 페이스가 붙었다 싶으면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 앞에 꽤나 전문적인 러닝 복장을 한 두 덩치 큰 사람이 뛰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더 가겠지만 그는 도로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나자 뒤로 돌아 되돌아간다. 이제 대충 4킬로미터 가까이 달렸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또 다른 전광판 시계를 본다. 9시 11분. 아마 이 구간을 달리면서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약간 정신을 놓고 편안히 달린다. 그러다 문뜩 정신을 차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은 새로운 길을 갈 때보다 힘들기도 하다. 몸이 지쳐 더 그럴 것이다. 누군가 그를 앞지르지만 그는 속도를 내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그는 오늘 덜 지치고 더 개운하게 달리기를 마치고 싶다. 아까 마주친 천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에 도착해 건넌다. 강물에선 약한 비린내가 난다. 다시 N구 쪽 산책로로 돌아오면 항상 신기루가 보인다. 가장 지치는 구간이어서 그런 걸까. 다리를 건너면 그가 출발한 엘리베이터와 닮은 기둥과 푯말이 멀리 보이는데 처음 달릴 땐 저기가 엘리베이터군. 얼마 안 남았군. 하며 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방금 전에 봤던 엘리베이터는 사라지고 한참을 더 달려야 진짜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신기루로 착각할 만큼 지치진 않았다. 그는 기둥을 지나고 작은 체육시설이 있는 곳을 지난다. 농구장에선 젊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논다. 처음 출발했던 공터에 에어로빅하던 아주머니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전광판 시계는 9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킬로미터 정도. 오늘도 기대했던 만큼 뛰었다. 더 뛰고 싶은 기분과 이제 그만 쉬고 싶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항상 쉬고 싶은 기분이 이긴다.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걷는다.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며 계단을 오른다. 힘들지만 지난번 보단 덜 지쳤다. 속에 입은 흰 티는 땀으로 무겁고 살에 달라붙는다. 다리는 무겁고 관절은 삐걱인다. 오늘 같은 밤에 땀이 식으면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 아이는 잘 잠들었을까. 달리기를 할 때 스마트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항상 마음 한편에 작게 쓸데없는 불안감이 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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