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버스 정류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줄을 얼마나 잘 설까? 줄을 서는 대표적인 곳 중에 한 군데가 버스 정류장일 것이다. 나는 강남에 한 번씩 가는데 강남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간다. 강남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버스 정류장을 보면 모든 사람이 줄을 잘 선다. 수년 혹은 수십 년 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서 있는 풍경은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비해서 지금이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향상되어서 줄을 잘 서는 것일까? 물론 그런 면도 있긴 하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요즘 버스 정류장을 보면 바닥에 버스 번호가 적혀 있고 라인도 표시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서 줄을 서게끔 되어 있다. 그런 작은 변화에 의해서 사람들의 줄 서는 양상이 확연히 바뀐다. 이것은 시민의식과 크게 상관없다. 이런 곳에서 줄을 아무렇게 서는 사람은 없다. 모든 버스정류장이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은데, 아무런 표시가 없는 정류장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는 것은 시민의식보다 시스템에 의한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수십 년 전이 아닌 오늘날의 사람들도 버스정류장이 어떤지에 따라서 줄을 서는 정도가 다르고, 같은 지역 바로 옆에 있는 정류장이라도 버스정류장의 시스템에 따라서 줄을 서는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이런 것들을 봐도 시대, 지역, 나이, 시민의식 정도가 미치는 영향보다 조그마한 시스템이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남자 화장실의 변기에 파리를 부착하였더니 남성들이 변기에서 소변을 흘리는 경우가 80%나 줄었다고 하는 넛지(Nudge) 효과와 같다. 사람들에게 교육하거나 의식이 변하였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주 사소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다시 강남의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줄을 섰고 사람들 모두 줄을 잘 섰으며,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사람들은 차례를 치켜서 버스에 올랐으며 버스에 좌석이 꽉 차서 나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그래서 버스를 보내고 다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두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나는 세 번째였다. 버스가 오기를 15분 정도 기다렸고 그러는 사이에 내 뒤로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섰다. 15분쯤 기다린 후에 드디어 버스가 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내가 기다리던 버스만 왔으면 아무 문제없이 질서가 유지되었을 텐데 다른 버스와 함께 두 대의 버스가 동시에 도착했다.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A이고 다른 버스가 B라고 하면 B라는 버스가 앞에 오고 A 버스는 바로 뒤에 따라서 왔다. 나는 여전히 버스 탑승 대기하는 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B 버스에 승객이 다 타고 출발하고 나면 A 버스는 B 버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정류장에서 승객들을 태우고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던 A 버스가 버스정류장 도착하기 전인 B 버스 뒤에서 버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동안 잘 유지되고 있던 줄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줄을 서고 있던 모든 사람이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젠 질서는 사라지고 무질서만 남았다. 1분을 기다렸든 15분을 기다렸든 이제는 먼저 달려가서 타는 사람이 더 빨리 버스에 탑승하게 된다.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잘 서는 것도, 무질서하게 버스에 오르는 것도 모두 아주 사소한 환경변화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애초에 시민의식의 향상 때문에 예전보다 줄을 잘 서게 된 것이 아니다. - 물론 예전에 비해서 시민의식은 많이 향상됐다고 생각은 하지만-
버스 기사님이 처음에 버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차 문을 열어서 환경을 만들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제 위치에 정차해서 승객들을 태웠다면 줄은 무너지지 않고 질서 정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류장 전에 문이 열렸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줄을 벗어나서 버스를 탑승하러 달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최초에 어느 한 사람이 버스로 달려갔을 것이고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계속 줄을 서고 있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탑승하게 되고 나는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거나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줄을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질서를 지키면 손해를 보고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이익을 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질서(혹은 법, 약속, 규약 등)를 지키면 손해 보고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불이익 없이 혜택을 누리는 것들을 많이 봐와서 더욱 그럴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가 시민의식의 수준이 높았다면 앞의 사례의 경우에 처음으로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벗어나 뛰어가는 사람이 없었을 테고, 나아가서 한 명이 뛰어갔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면 질서가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시스템으로 사람들을 줄을 서게 했다면 그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의 시민의식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시민의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교육이나 캠페인을 통해서 시민의식을 고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