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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Feb 22. 2021

팬데믹 패닉

Don't Panic! - 보고듣고말하기2 #2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주인공 아서 덴트는 지구가 은하계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로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의 친구이자 외계인인 포드는 아서를 자신의 우주선에 태우고, 겁먹은 그에게 타월 한 장을 건넨다. 타월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Don’t Panic!” 


지구가 먼지로 흩어지는 걸 본 이에게 겁먹지 말라니. 하기야 도무지 감당되지 않는 일이 벌어져, 해결은커녕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어 보일 때 이보다 유용한 조언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2020년은 다소 시니컬한 이 조언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해였다.     


2019년 12월 30일 중국 우한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폐렴이 확산하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20년 1월 26일 국내 첫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21세기 인류는 사스, 메르스 등의 전염병을 경험하였고, 2009년에는 신종플루 확산으로 인한 팬데믹 사태를 겪은 바 있다. 전염병 사태는 반복되었고, 거듭될수록 위력을 더해갔다. 


2020년 우리는 앞선 여러 차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많은 국가에서 의료시스템이 붕괴하고, 국경이 폐쇄되고, 노약자들이 방치되고, 이주민과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 범죄가 증가하였다. 가짜 뉴스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SNS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북하우스


팬데믹이 불러온 위기의 본질은 팬데믹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병증이 환자의 기저질환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팬데믹은 체제의 취약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위기를 심화하였다. 슬라보예 지젝은 저서 「팬데믹 패닉」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온 위기의 본질적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다고 말한다. 팬데믹을 둘러싼 많은 담론과 주장, 예컨대 뉴노멀과 언택트, AC와 같은 새로운 조어와 달리 지젝의 주장은 고루하고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인간의 불안은 대게 무지에 기인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우리의 뇌는 참을 수 없어 한다. 현상의 단편을 떼어다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얼마간의 불안은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파국의 근원이 아니라 결과만을 해석하는데 다급할수록, 우리는 다음에 닥쳐들 위기 앞에 더욱 쉽게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병리적 증상 너머, 위기를 가속한 체제의 균열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어째서 장애인 시설, 공장과 물류센터,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지속하여 집단 감염이 발생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갇혀 있어야 하며,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노동해야만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신자유주의의 조정에 의해 허물어진 사회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밀려난 이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사회적 단위에 관하여 분석해야만 한다.


네이버·배민·카카오·쿠팡 같은 플랫폼이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하는 한편 실업률과 비정규직 일자리가 동시에 급증하는 현상을 함께 말해야만 한다. 증가하고 있는 여성 자살률, 학교가 문을 닫아 발생한 공교육의 공백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 패닉에 빠지기에는 다음 위기까지 주어진 시간이 충분치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가 중국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음 팬데믹의 시작점은 남미나 유럽, 혹은 극지방의 동토일 수도 있다. 전 세계 인구는 80억을 넘어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도시화 역시 점차 빨라지고 있다. 보수적으로 계산하여도 2050년에는 인류의 80% 정도가 도시에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인구밀도는 높아지고, 도시는 확장됨에 따라 숲은 베어 사라질 것이고 들판은 콘크리트로 뒤덮일 것이다. 


기후변화와 도시화로 서식지에서 쫓겨난 야생동물들이 늘어날수록 인수 공동 전염병은 더욱 자주 발생할 것이고, 높은 인구밀도의 도시에서 전염은 급속도로 이뤄질 것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나온 것처럼 지구가 순식간에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위기가 꾸준히 반복됨에도 체제의 취약성과 균열을 찾아 해결하는 일에 실패하여, 재난이 일상화된다면 우리는 천천히 사라져 가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타월로 머리를 덮고 이건 다 꿈이며 지나갈 일이라고 되뇌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은 패닉에 빠질 때가 아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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