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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r 14. 2024

Ray's a Laugh

너희는 누구냐

삶을 증명해야 할 때가 있다. 불과 몇 년 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숱하게 많은 날을 자기소개서를 쓰고 다듬으며 보내던 때가 있었다. 문서 두세 장에 성장 배경·가치관·장래 포부 같은 것을 쓰는 일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몇 번의 퇴사와 입사를 통해 배운 건 누군가에게 내 삶을 잘 설명하는 법이 아닌,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이라는 걸 설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밥벌이라는 비포장도로로 진입하기 위하여, 깜빡이도 켜보고 창문 밖으로 두 손을 내밀어 싹싹 빌어보기도 하는 그런 일들.


사실과 과장, 주장과 생략으로 삶을 써내는 일보다 더 고역인 건 면접이었다. 미심쩍은 눈초리의 면접관 앞에 설 때면, 속으로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되뇌고는 했다. 열정적이고 긍정적이며 인내심이 많은, 자기소개서에 기재된 나에 대해 외웠다. 단역이라도 좋으니, 기회를 달라 간청하는 배우의 심정으로, 어째서 더 노력하지 않았는지 지난 삶에 대해 반성하였다. 그에 비하면 연말정산 때가 되어서야, 한 해를 되돌아보는 요즘은 얼마나 안온하고 무탈한지. 오직 숫자로만 한 시절을 들여다보는 일은 또 얼마나 간단명료한지. 숫자에는 군더더기가 없어, 설득이 필요 없다. 입력과 결과만 있을 따름이다. 일 년이 얼마의 값으로 치환되었고, 그중 어느 정도를 써버렸는지가 한눈에 읽히는 경험은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나 삶은 늘 명확한 값을 뱉어내는 기계가 아니다. 군더더기 없는 일상은 숫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온전한 삶은 될 수 없다.


영국의 사진작가 리처드 빌링엄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속절없이 증명할 수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96년 펴낸 사진집『Ray's a Laugh』에는 온통 군더더기로 가득하다. 어떤 앵글에서 어떤 피사체를 찍은 사진이든 과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벽지는 벽면마다 무늬가 다르며, 수납장의 도자기 인형은 어떤 기준으로 수집되고 배치되었는지 파악이 불가하다. 마치 이국이라는 단어만을 가지고 상상한 나라의 유물 같은 정체불명의 가면과 소품은 또 어떠한가. 피사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외려 불신을 일으킨다.


시큰둥하고 피곤한 표정, 부스스한 머리, 시큰둥하고 피곤한 표정, 삶의 무게가 짓누른 듯 말린 어깨, 주름진 몸, 화려한 원색과 패턴의 옷, 문신, 담배, 술. 이 모든 걸 담은 35mm 필름 카메라. 부모와 함께 나이 든 아파트를 찍는 아들, 더께가 진 것 같은 잡동사니1)와 그 사이사이를 순간 밝히는 플래시. 무시로 한 눈을 감은 채 뷰 파인더에 나머지 한쪽 눈을 가져다 대는 이의 마음. 그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리처드 빌링엄과 그의 작품에 대해 찾아보기도 전에 나는 앞질러 가 확신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낳고 길러낸 지리멸렬 하고 지난한 주변에 대한 환멸과 사랑을 내보이고 싶었던 거라고. 그리 믿기로 하였다.


대개 취향은 일관된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이어감에 따라 형성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취향이 고유성을 획득하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과잉을 시도하였는지에 달려 있다. 드레스 셔츠와 짝을 이루는 커프 링크스처럼. 핵심은 규칙과 과잉 사이의 균형이다. 과잉이 제거된 규칙은 따분하고 규칙을 잃은 과잉은 서투르기 십상이다. 리처드 빌링엄이 담아낸 주변의 풍경은 굳이 따지자면 규칙 없는 과잉이다. 그렇게 읽힌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레이와 리즈가 수십 년간 쌓아온 삶의 자리가 무질서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문제다. 노동 계급의 삶을 몇 가지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치부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취향을 키울 토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믿어버리는 샌님들의 문제다. 커프스 링크스 따위를 고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 말이다. 다시 리처드 빌링엄의 사진을 보자. 그가 셔터를 눌렀을 때 터진 플래시가 어디로 뻗어나가 닿았는지를.


Ray's a Laugh ⓒRichard Billingham


차를 권하고,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퍼즐을 맞추는, 멍하니 앉아 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포옹하고 언쟁을 벌이고, 비틀거리다 넘어지고, 웃고 키스하는 두 사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꾸리고 가꿨을 주변과 오랜 시간 일관되고 충실히 쌓았을 관계가 보인다. 누군가 그들에게 삶을 증명해 보라 요구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노동 계급은 너무도 쉽게 몇 장 서류와 숫자로 삶을 재단 당한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인 블레이크는 심장 질병을 앓고 있는 노년의 목수이다. 지치고 노쇠한 그는 질병 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수없이 심사를 요청한다. 많은 시도 끝에 단 3점 차이로 심사에서 탈락한 그는 복지 센터를 나와 벽 앞에 선다. 한 손에 스프레이를 든 채로. 블레이크는 벽에 단 한 문장을 반복하여 적는다.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2)


군더더기 없는 삶은 숫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은 될 수 없다. 『Ray's a Laugh』역시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는 너희는 누구냐고. 증명할 수 없는 삶은 너희만의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1) chachkies: 장신구와 수집품을 뜻하는 이디시어(아슈케나즈 유대인이 사용했던 서게르만어군 언어) 단어로, 할머니 댁에서 볼 수 있는 '황혼의 수집가'라고도 한다.
 Urban Dictionary, “chachkies”, https://www.urbandictionary.com/define.php?term=chachkies2)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켄 로치,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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