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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r 14. 2024

기능-이탈

기능하지 않는 사물에는 영혼이 깃든다. 한낮의 가로등, 거리에 내팽개쳐진 일회용 우산, 때 묻고 헤진 인형, 시간의 더께에 파묻힌 유실물들. 사물은 탄생하여 기능하고 마모되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정지한다. 부여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사물을 볼 때면 안정과 조바심이 동시에 찾아든다. 쉼에 다다른 그들은 영영 그대로일 것 같다가도, 예기치 못한 순간 박동하여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것만 같다. 기능해야 할 것이 기능하지 않으면 다른 무언가가 기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를 테지만, 원한다면 정서나 추억 혹은 이야기라 칭하여도 양해할 의사가 있다.


사 년 전 가을, 잡지에 실을 인터뷰 기사 작성을 위해 도림천역 부근으로 출장을 나갔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한 공사장 앞을 지나쳤다. 공사장은 노란색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평일 낮임에도 주변은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이나 차량도 드물었다. 걸음을 멈춰 가림막 앞에 서자, 어렴풋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곳에 무언가 있다고. 그것이 나를 알아봤다고.1)



기능은 사물에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고유성을 발현시킨다. 종이책이 읽는 이의 손에 맞춰 접히고 구겨지고, 신발이 걷는 이의 걸음새에 맞춰 닳는 것처럼. 정지한 사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기능하는 시간에는 미처 몰랐던 흔적을 알아차리게 된다. 저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또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지만. 저것에 가해진 시간을 더듬더듬 읽어갈 수는 있다. 노란색 가림막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 망토를 대신해 주었던 보자기를, 여름날 옥상 건조대에 내걸었던 옷들을 기억해 냈다. 그 추억 덕에 바람에 일렁이는 가림막이, 철골과 중장비를 감춰야 할 외피가 아니라 잠든 이의 눈꺼풀처럼 느껴졌다. 꿈의 약동에 따라 쉴 새 없이 떨릴 당신의 살갗처럼.


기능에서 벗어난 사물은 새로운 인식을 촉발한다. 그것이 더 이상 그것만이 아니게 될 때, 우리는 틈과 마주한다. 본래 틈이라는 건 점점 벌어지기 마련인데 틈이 크면 클수록, 앞에 선 이는 그곳에 내려앉은 무언가를 강하게 느낀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르지만, 당신이 무어라 부르든 너그러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김범 작가의 작품 <“노란비명” 그리기>2)는 25호 캔버스에 “노란비명”이라는 추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기록한 비디오이다. 작가는 영상에서 다양한 노란색 물감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기록하는데, 영상의 구성은 밥 로스3)의 쇼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자신이 그릴 그림의 기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란비명"  ⓒ김범

“이 그림의 기법은 붓 자국에 비명 소리를 담는 건데, 붓이 화면을 지나갈 때 붓과 화면 사이에 ‘어’하고 소리를 지르시면 됩니다. 마치 붓과 화면 사이에 비명을 붙잡아두려는 듯이 말이죠.”


설명을 마친 작가는 노란 물감을 묻힌 붓을 들고, 캔버스에 선을 그으며 비명을 지른다. 비명은 ‘육체적·정신적 고통, 후회, 슬픔, 공포, 분노, 짜증, 혼란, 고뇌, 절망, 기쁨, 희망에 따른 것들로 나뉜다. 작가는 세부적인 감정 상태와 그에 따른 비명의 양태를 설명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색 조합과 붓칠을 시연한다. 여든여덟 번의 비명4) 끝에 완성된 “노란비명”에서 사물의 기능과 인식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상 초반 붓과 화면 사이에 비명을 붙잡아두겠다는 작가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요소는 없다. 애초에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붓질은 비명을, 물감은 붓질을. 캔버스는 붙들림을 표상할 따름이다.5)  “노란비명”은 기능에서 이탈하여 인식이 선행된 것들의 총체이다. 이것은 애초에 ‘더 이상 이것만이 아닌 것’으로 탄생한 셈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이미 영혼6)이 있다.


1996년 제작된 김범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은 여덟 개의 사물이 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다. 그중 4장 ‘바위가 되는 법’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앉거나 눕는 등 몸을 낮추어 하나의 형태를 정하되,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틈에 자리한 영혼은 분명 이런 자세로 존재할 것이다. 기능을 멈추거나 기능에서 이탈한 것에는 고유하되 무엇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그리하여 마주한 이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게끔 하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영혼이 우리와 직접 대화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잖아요. 단지 행복한 사고가 일어났을 뿐이지.7) 


노란색 가림막을 지나친 뒤 한동안, 멈춰 있는 사물과 만나면 잠시간 그들의 곁을 지켰다. 정처 없는 마음으로, 그들이 언젠가 박동할 순간을 기대하며.



1) 오랫동안 인간은 인식이 현실을 형성·분해·재구축한다고 믿었다.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저서『황금가지』에서 주술의 사고 원리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첫째는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또는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한 번 접촉한 사물은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계속 서로 작용을 미친다는 것이다.”(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 한겨레출판, 2003, 83쪽.)
 조선 전기 문헌『용재총화』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한양에서 어떻게 기우제를 지냈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창덕궁 후원, 경회루, 모화관 연못가 세 곳에서 도마뱀을 항아리에 띄운 뒤, 청의동자 수십 명이 버들가지로 항아리를 치며 비를 내리라고 외쳤다는 내용도 있다.(한동훈,『무당과 유생의 대결』, 사우, 2001, 160쪽.) 비를 주관하는 용을 붙잡아 올 수 없으면, 용을 대신할 화신을 잡아와 겁박하면 된다는 인식. 그 인식이 현실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주술적 사고 관념에서 사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개체이다.

2) 김범, <“노란비명” 그리기>, 201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1분 6초.

3) 1983년에서 1994년까지 미국 공영방송 PBS의 텔레비전 쇼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The Joy of Painting)”을 진행한 화가.

4) 김범 작가의 <“노란비명” 그리기>에서 등장한 비명의 횟수 88번으로 측정되었다. 본 측정의 신뢰수준은 현저히 낮다.

5) <“노란비명” 그리기> 속 작가는 김범 작가 본인이 아니다. 그는 김범 작가를 대신한 퍼포머이다. 영상에서 퍼포머는 김범 작가를 표상한다.

6) 누차 이야기하지만 이것에 대한 호명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다.

7) We don’t make mistakes. We have happy accidesnts. - 밥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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