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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l 20. 2024

종이배 띄우기

-<투명한 힘>

캐슬린 스튜어트의 <투명한 힘> 속 이야기는 주로 응시와 포착으로 구성된다. 인과는 헐겁고 직감은 순식간에 뻗쳐온다. <투명한 힘>이 펼쳐놓는 짧은 이야기들은 뚜렷한 결론으로 향하지 않고, 시작된 자리를 맴돌거나 방치되다시피 던져진다. 왜 아니겠는가? 인과는 언제나 뒤에 온다. 그것은 해석일 따름이고, 주관적이며 다소 허구적이며, 심지어는 때에 따라 달리 배치될 수 있다. 결론에 다다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잠시 소문을 전파하는 수다쟁이가 되어보자. 당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뻔한 이유로 마음을 뒤흔드는 어떤 장면과 사람을 목격했다. 당신은 질색과 경이, 혐오와 경탄 중 어딘가에 위치한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혹은 며칠 뒤 만난 이에게 그때의 장면을 설명한다. 어떠한가? 순간이 논리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갖췄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나 할 이야기 있어.”라고 시작된 당신의 이야기는 십중팔구,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라는 상대의 반문과 함께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당신의 부연 설명과 상관없이, 이야기는 전염되었으며 새로운 숙주의 기억 저편으로 파묻혀 망각되거나, 예상할 수 없는 작용을 이끌어 낼 것이다. 이야기가 살아남는다면, 그래서 다시 알음알음 퍼져나간다면, 어느 날 밤 홀로 누운 이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되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어떻게 된 거야?”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우리처럼 말이다.


<투명한 힘>의 원제는 <Ordinary Affects>이다. 캐슬린 스튜어트의 다소 난해한 설명보다는 옮긴이 신해경 씨가 설명하는 Affects가 다소 이해하기 쉽다. 신해경 씨는 정동 또는 감응으로서의 Affect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동은 흐름으로만 관찰되는, 흐르면서 개인들의 몸을 관통하며 서로 공명시키는 감각의 지속이다. (중략)이미 구축된 현실을 규정하는 법이나 제도, 관습과 상식 등은 이런 정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굴절시키는 고정된 궤도나 회로 같은 것이며, (중략) 정동은 진부하고 평범한 일상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서 흐르고 비상하고 표류하는 들썩이는 어떤 힘이다. (중략) 우리의 무의식은 정동에 공명하고 반발하고 부딪치고 재현하며 그 반향을 전달하거나 단절하거나 증폭하거나 굴절시키고, 우리의 정체성은 그때마다 새로이 구축된다. (중략) 하지만 정동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감각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나 이 제도와 저 관습의 충돌 같은 사건을 통해서만 반짝 드러난다.”


캐슬린 스튜어트, 투명한 힘 ⓒ밤의책


정동은 우리가 떠밀어진 일상의 흐름이며, 우리는 작은 종이배와 다름없다. 흐름은 당신을 이리저리 떠민다. 그것은 선형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당신이 그걸 인지하든 안 하든, 당신은 종이배에 불과하고 언제가 흠뻑 젖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은 운명이 아니다. 흐름은 끝없이 유동할 뿐 의도하지 않으며, 종이배는 떠밀릴 뿐 제 밑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종이배는 흐름이 자신을 다른 종이배로 떠밀 때, 그리하여 부딪힘과 잔해가 발생할 때에야 흐름을 인지한다. 그때에도 흐름은 다만 잔해를 집어삼키고 두 종이배를 먼 곳을 보낼 뿐이다. 


이번엔 종이배에서 밤하늘로 옮겨 가 볼 차례다. 어두운 밤, 당신은 산 중턱에 다다랐다. 도시의 조명이 힘을 미치지 못할 만큼 높은 동시에, 하늘의 별이 다 담아지지는 않을 만큼 낮은 곳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당신은 경탄할 것이고 다소 오래된 기억을 간만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의 당신은 천체관측 동아리 회원이었고, 그때 배운 몇몇 별자리를. 여전히 그러나 간신히 기억한다. 당신이 지금보다 좀 어린 시절, 당신은 지금은 헤어진 옛 연인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별자릴 직접 설명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소중한 추억이지만, 한밤중 산 중턱에 다다른 당신은 부지불식간에 깨닫는다. 더는 당신이 그 별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망각의 축복이 내려앉은 건, 별자리뿐만 아니라 어느 날 밤 옛 연인과 별을 보며 나눈 대화도 마찬가지라는 걸.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그리지 못한 당신은 이유에 대해 고민한다. 당신은 인과가 필요하다. 그렇다, 그건 당신은 필요일 따름이다. 인과는 뒤에 오고, 사건은 늘 앞선다. 당신은 반응하기 위하여 인과를 만든다. 


이런 예도 가능하겠다. 다소 이르게 퇴근한 당신은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정류장 뒤편에서 당신은 그동안 당신이 발견하지 못한 글자를 발견한다. ‘탄핵 무효’ 당신은 그 글자를 보며 헛웃음을 내뱉는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상상이 시작된다. 출근 시간은 지난 지 오래고, 퇴근 시간을 헤아리기는 아직 한참 남은 늦은 낮. 햇볕은 게으르고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 한낮. 모자를 푹 눌러쓴 이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 얇은 외투에는 매직이 들어있고, 타야 하는 버스를 몇 대 보낸 그이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 그만 참지 못하고 단번에 적어 내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타고 떠난다. 다음 목적지를 체크하며. 당신은 이게 허무맹랑한 상상임을 안다. 그럼에도 당신은 당신을 당황하게 한 낙서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하고야 만다. 당신은 자신의 편견과 혐오, 오만과 부박함을 옅게 인식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탄다. 짧은 졸음에 빠진 당신은 이 모든 걸 잊는다, 참지 못하고. 


어떠한가? 이번에도 당신은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돼먹은 일인 거야?”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제 정동과 인과는 잠시 잊어보자.


캐슬린 스튜어트는 <투명한 힘>에서 미국의 현재,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그려낸다. 신자유주의, 약탈적 자본주의 같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짧은 이야기들 속 대다수 인물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떠미는 추동이 정지할 때, 실은 그것이 방치는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드는 날들. 우리를 휘감고 몰아붙인 것들로부터 방기되어 버렸다는, 체제로부터 탈각된 존재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자유로움과 무질서로 가득한 날들. 시시콜콜하게 진술될 수는 있으나,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되기는 어려운 장면과 뉘앙스들. 도무지 물화 되지 않는 징조와 비밀들. 그 사이로 종종 튀어나오는 것들은 야만과 종말의 징후로 읽힌다.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삶을, 파국을 불러오는 이들에 천착한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가 아니다. 문제는 이 시대가, 우리 밑의 흐름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저마다 각자가 꿈꾸는 종말의 징후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개별의 종이배가 아니라, 흐름에 삼켜지는 잔해로 보게끔 한다는 것이다.


캐슬린 스튜어트가 시를 쓰듯, 펼쳐놓은 이야기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헐거운 인과를 넘어, 직감으로 단번에 서로에게 가 닿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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