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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Oct 03. 2024

거부하는 서사

<레티파크>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방, 천장에 매달린 등불 하나만이 주변을 밝힌다. 우리는 심문받는 중이다. 취조자는 증언을 요구한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만, 진술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지는 못한다. 증인인 우리가 우리의 증언의 진실성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취조자는 우리에게 증언을 반복하여 요구한다. 거듭되는 진술은 수많은 판본의 증언을 낳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좀처럼 만족을 모르는 취조자가 중지를 명한다. 마침내 그 역시 거듭되는 증언을 견디지 못한 까닭이다. 취조자는 우리의 증언, 시점과 순서, 행동과 반응, 의도와 추측이 조금씩 다른 그 모든 증언을 한데 모은다. 그는 증인이자 취조자였고, 이제는 편집자이다. 그는 판본의 중첩과 예외를 검토한 끝에 하나의 서사를 내놓는다. 그러나 공인된 서사의 지위는 불변하지 않는다. 편집자는 언제든 증인이자 취조자가 될 수 있기에 심문의 시간은 다시금 찾아오기 마련이다. 다만 같은 이유로 서사는 증언에 종속되지 않는다. 한 번 탄생한 서사는 말하고 기운 이의 바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때때로 그 존재는 다른 누군가의 증언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사건은 재현을 거부한다. 실제의 사건이든, 가상의 사건이든 재현은 사건과 경합한다. 재현을 위해 동원되는 기억, 혹은 상상이 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재현은 주체 없이 이뤄질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재현은 사건의 일부분을 죽임으로써 태어난다. 이때 서사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건 그 자체일 수는 없으며, 사건을 지향하지만 사건에 도달할 수는 없다. 모든 서사는 존재하는 동시에 그 근원으로부터 존재를 거부당한다.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 매체는 이러한 모순을 여러 방식으로 이용했다. 복수의 재현, 신뢰할 수 없는 주체, 현실의 무화 등 사건과 재현을 여러 층위에서 비틀고, 단절하고, 왜곡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재현의 주체이지만, 그렇기에 곧 회의와 의심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작가 자신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어떤 경험과 증언을 낳는가.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는 그런 의문을 불러온다.


<레티파크>는 열일곱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와 무관하지만, 서로 중첩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그가 사건과 재현을 다루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유디트 헤르만의 펼쳐내는 사건이란 무엇인가. <레티파크>의 첫 번째 작품, 「석탄」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일들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인상과 함께 집으로 갔다.”



유디트 헤르만, 레티파크 ⓒ마라카스


돌이킬 수 없이, 그러니까 불가역적으로 발생해버린 어떤 일이야말로 사건의 속성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일은 발생했고, 부인할 수 없다. 「석탄」 속 화자는 그런 사건은 결말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중이거나, 심지어 막 발발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사건은 언제나 말해질 수 있다. 다만 온전하지 않을 뿐이다. 아직 어떤 일부분을 죽여야 할지 미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심문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공인되고 불변하는 서사가 불가하다는 걸 안다. 그렇다. 모든 사건은 그것의 불가역성과 무관하게 언제든 말해질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증인으로서 우리는 「석탄」 속 화자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돌이킬 수 없음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건이 재현을 거부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레티파크> 속 중심 인물들은 언제나 사건과 재현의 과정에서 공통의 인상, 말해져야 할 것은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다는 예감에 시달린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이들의 위치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이야기 속에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서사가 재현을 거부하듯, 인물들이 서사를 거부한다. 그들은 확신하지 못하고, 미루어 짐작하고 상상한다. 때때로 그들은 계시적 상황에 놓이지만, 행동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들은 어떤 것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사건으로부터 비켜 나간다. 계시는 실패하고 운명은 다시 저 멀리 떠난다. 교차가 다시 발생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말하는 이는 천진난만하게 상실과 실패마저 놓친다.


유디트 헤르만은 <레티파크>에서 의도적으로 덜 재현함으로써, 또다른 심문의 시간을 유보한다. 공인된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여러 판본, 복수의 가능성이다. 독자는 이 틈 속에서 이야기 너머를 경험한다. 온갖 것이 들끓는 난장을 지나치고 나면 하나의 비애가 남는다. 긴 생을 다 살고 난 뒤의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마음을 더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레, 그러나 결결이 찢어버리는 잔혹함이 충만함과 공존한다. 


어떠한 때에, 그러니까 낮도 밤도 아닌 시간에 나는, 증인으로서 취조자로서 또 편집자로서, 무엇보다 독자이자 작가로서 하나의 생과 마주하였다고. 나의 증언과 심문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어떤 부분은 분명 이러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레티파크>는 다시 한번 답을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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