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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어 Jan 06. 2020

2019년 1월. 내가 모르는 나.

#월간안전가옥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 휴직계를 내고, 세 달 짜리 유럽 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는 거의 지인 가정 방문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스톡홀름에 사는 친구와 며칠, 독일에 사는 언니 오빠 부부와 며칠, 그 다음엔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들을 만났다. 있는 곳이 서울이 아니다 뿐이지 만나서 차 마시고, 밥 먹고, 술 마시고, 같이 놀러 가고. 따지고 보면 서울에서와 비슷한
생활이었다. 

그러다 약속한 만남이 다 끝나고 진짜 혼자가 되어 떠난 첫 번째 도시가 포르토였다. 해가 거의 다 진 오후에 시내에 도착해서, 언덕배기에 있는 호스텔까지 38kg 짜리 짐을 밀고 끌며 올라갔더니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체크인을 하고, 새 수건을 사러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괜찮은 곳을 검색해서 프란세지냐와 흑맥주로 첫 저녁을 먹었고 호스텔로 돌아와 조금 외로워하면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슬슬 정신을 차리는데 맞은편 침대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대략 기억나는 대화는 이런 식이었는데,

- 너 여기 꽤 오래 있나 보네? 그 침대를 받은 걸 보니. 

- 그래?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 나 여기서 5박 하거든.

- 좋겠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포르토에서 뭐 할 거야?

- 나 사실 뭐 할지 하나도 몰라.. 나 좀 길게 여행 중인데 여기 오기 전에 하나도 공부를 못 했어. 

- 그래? 그럼 내가 딱 두 가지만 추천할게. 하나는 지금 나가서 워킹 투어하는 것, 두 번째는 오늘 호스텔에서 저녁 먹으라는 거야. 


둘 다 한 번도 안 해 본 것들이었다. 워킹 투어는 나도 관광객이지만 ‘너무 관광객들이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었고, 호스텔에서 먹는 저녁은 ‘포스퀘어에 찍어둔 맛집 가기도 바쁜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다고는 말 못 하고 애매하게 헤헤.. 웃었다. 그러자 ‘그럼 워킹 투어는 내일 가고 오늘은 호스텔에서 저녁만이라도 먹어봐! 나 믿고!’ 하는 단호한 말이 돌아왔다. 


이 여행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내 여행은 포르토 전과 후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나는 그의 말대로 그날 저녁에 호스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은 친구와 다음날 아침 워킹 투어를 같이 했다. 그리고 워킹 투어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호스텔에서 저녁을 먹고, 바에 가서 새벽까지 춤추고 뛰어놀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그로부터 포르토에 있는 내내 사람들과 몰려다니고, 떠들고 웃으면서 놀았다. 포르토 이후로 나는 먼저 말 걸고, 먼저 웃고, 먼저 놀자고 부추기는 사람이 되었고, 그 덕에 남은 일정에선 상상도 안 해 본 경험들을 하게 됐다.


뭐 그렇다고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가 생겼던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우리들은 서로의 랜선 친구로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내가 포르토에서의 시간을 높이 사는 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한 마디 덕분에 내가 몰랐던 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같은 방의 귀인은 나에게서 뭘 보고 워킹 투어를 권했을까. 그냥 자기도 해 봤는데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콕 찍어 나에게 권하고 싶었던 걸까.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내가 모르는 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나'는 내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나일 수도 있고, 나는 모르지만 남들에겐 보이는 나 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더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알고 싶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고, 스스로의 이상에 어긋나는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시하기 시작하면, 내가 모르는 나는 점점 더 커진다. 그렇게 실제의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괴리가 커지면, 우스운 사람이 된다. 주위 사람은 피곤해진다 - 저 사람은 자기 티끌은 못 보는 구나, 내로남불이구나. 


최근 몇 년 동안 자주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환경에 따라 나도 바뀌고, 만나는 사람과 생각하는 주제가 달라지면 내 말과 행동도 달라지는 걸 더 생생하게 느낀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자주 고민하고 생각한다.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나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져 있지는 않은지, 남에게 설명하는 나에 대한 묘사가 듣기에 우스운 것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좋아하는 동료, 친구들과 길고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제일 기초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도 한 달이 지났다. 안전가옥에 와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두 명의 운영 멤버와 헤어지고, 새로운 멤버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뭔지는 아직 비밀이지만(!) 더욱 다양한 분들이 안전가옥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고 있다. 2019년에 새롭게 만날 나는 어떤 나일까.



함께 클레리고스 타워를 올랐던 저녁 같이 먹은 + 같은 방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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