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하지 못한 숙소

자기 결정을 못하는 여행자가 고생하는 이야기

by 클레어


5년 동안 다닌 첫 직장에 휴직원을 제출했다.


나는 첫 번째 할 일을 세 달 간의 여행으로 정하고 올해를 자연스럽게 마무리 해 버리기로 했다.

회사도 안 가겠다, 일정 짜고, 동선 짜고, 숙소 예약하고, 장거리 기차 먼저 예약하고, 일하듯이 술술 하면 되는 일인데


이상하다.

속도가 안 난다.

속도가 안 나서 예상 예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빠른 업무 처리 속도와 나름 일잘로 살아 온 알량한 자존심에 물음표가 찍히기 시작했다.

나 왜 이렇게 결정을 못하지? 왜 이렇게 질질 끌지? 나 멍청인가?



나 지금 굉장히 답답하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나의 첫 일터에서 뭔가 '만족할만한' 성취감을 얻으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함께 대학 생활을 보낸 여느 친구들과 다르지 않게 많이 뽑으니까 대기업, 다 떨어지니까 중소기업,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회사들 순으로 지원서를 냈다. "내가 가고 싶은 회사"란 그나마 "나는 내가 주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기 최면에서 비롯한 마지막 오기였다. 우선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지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합격 통지 앞에서 쉽게 다른 선택지들을 버릴 수 있었다.

다 그러는 줄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좀 놓였고, 나는 그나마 인생을 고민하면서 사는 축이라고 생각(자만)했다.그리고 솔직히 길어야 2년 정도 다닐 줄 알았다..


신입사원을 지나 5년차 김대리가 되는 과정에서 운이 좋게도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만나 밤을 새가며 일할 수 있었다. 배워 가며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가 큰 일이었고 노력한 이상의 좋은 평가도 받았다.

비록 의사결정권자가 관심을 갖는 일이 아니더라도, 보고(인지 재교육인지)를 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하더라도,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어가는 일인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내 정치꾼 멍청이들과 싸움을 거듭해야 하더라도.


어딜 가도 다 그렇다, 나가면 더 춥다, 이제 와서 어딜 가냐, 누가 이 월급 맞춰주냐는 위협과

엄마를 길게 설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믿고 일할 수 있는 좋은 동료들, 고용 안정성. 게으름.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막다른 곳까지 몰리고 나니 비로소 좁아져 있는 앞길이 보였다.


내가 눈을 가린 동안, 갈급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떠났다. 그렇게 존경할만한 동료들이 떠났다.

지금까지는 자가발전으로, 혼자만의 보람, 알량한 인정에 만족하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배움 없이 속을 박박 긁어다 쓴 대가가 이것이구나 싶어 목 뒤가 서늘해졌다.


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니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한 일을 설명하는데도 자신이 없었다.

자꾸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고 나 아닌 다른 사람, 다른 것에 최종 결정을 넘겼다.

내 인생에 내가 결정하는 일이 없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 '익히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느껴졌다. 금방 다 망한 것 같다가도, 내일 아침 출근할 곳이 있으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그런 내가 싫다가도 좋다가도...


다행히 이 시점에 몇 번의 일깨움과 부추김이 있었다.


everybody.PNG 레드 아저씨도 한 마디 해주심 #항상옳아


그래서 우선 임시적으로나마 뛰쳐나오게 되었다.


지금 겨우 90일 짜리 여행의 동선과 숙소를 매일 바꾸고 가지도 않은 숙소를 미리 후회하느라 정신이 없는, "Free-cancellation" 마케팅의 매력에 푹 빠진, 네이버 카페, 트립어드바이저 포럼을 뒤져가며 "내가 가는 내 여행"의 결정을 혹시나 떠넘길 데가 있을까 찾고 있는 나를 보면서.


5년 동안 회사가 나에게 만들어 준 나쁜 버릇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이 훨씬 심각하고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똑같은 미래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버릇을 만들고 나쁜 버릇은 버려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도 되새기고 있다.


앞으로 갈 여행은 그냥 여행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고 어디를 갈지, 얼마를 쓸 지 작은 것부터 결정하면서 잃어버린 자기 결정을 찾고, 잃어버린 회복 탄력성을 '회복'시키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 아니고 그렇게 만들자.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 <자기 결정>의 작가 ‘페터 비에리’ 작가 인터뷰 http://ehbook.co.kr/23670


*The Secret of Becoming Mentally Strong | Amy Morin | TEDxOcala https://youtu.be/TFbv757kup4

Bad habit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결국은 자기 결정과도 맥이 닿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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