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톱니바퀴처럼 흘러가는 날들 (완결)

1호선 민달팽이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세미나에 참석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방이전 기관을 대상으로 지역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이대리는 지방이전 기관을 대상으로 정부부처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는 현실마저도 실감 나질 않았다. 서울에서는 방 한칸 구하는 월세로 이곳에서는 방과 거실이 분리된 집을 얻을 수 있었던 점은 마음에 들었다. 시내 중심가에는 아파트 위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어 1인 가구가 살만한 집은 없었는데 그래도 변두리 지역이라 월세가 저렴한 것이다.


다만, 편의점, 식당, 쇼핑센터 등의 상권을 누리려면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한다. 그 마저도 서울의 지하철 1호선 처럼 배차 간격이 일정하지가 않고, 조기에 운행을 종료하기도 해서 곤란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일주일 치 식량이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이대리는 서러운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가 않은 느낌이 어색하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지만 다행이 지나가던 택시를 겨우 잡아서 집에 갈 수 있었다.


회사는 김팀장님과 파견직 서사원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각자 자기 자리에 들어가 해야할 일을 하고 다음날도 똑같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누군가의 빈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고 있다. 톱니바퀴가 몇 개쯤 없어져도 회사라는 기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언제나 그대로 돌아가겠지 이대리는 생각했다.


문제는 서사원을 괴롭혔던 모 팀장과 차장이 김팀장님이 떠나면서 남겨진 공석을 두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부고로 인해 팀장 공석이 발생한 경우는 처음이라 김팀장님이 담당하던 조직은 팀장 없이 임시로 본부장이 관리하고 있다. 이 자리를 두고 모 팀장은 해당 팀을 본인이 흡수해서 조직 규모를 늘리고자 했고, 차장은 팀장 직책을 탐내면서 승진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대리를 불편하게 했던 점은 모 팀장은 김팀장님에 대해서 험담을 하며 온 직원들을 선동하고 있는데 굉장히 듣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김팀장은 직원들 밥이나 사주기나 하고 별 성과는 없지 않아? 다들 내밑으로 들어와 팍팍 밀어줄게!"


마지막까지도 지방이전 TFT를 맡으며 고생했던 분을 저런식으로 욕되게 하다니 이대리는 속에서 불이 나는듯 했다. 다른 팀장들은 저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본인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사히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 김팀장님 덕분이 아닌가? 하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 지금 하시는 업무도 버거워하시는 것 같은데 팀원들 관리는 제대로 하실 수 있겠어요? 본부장님이 팀장님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다던데?"


"너 뭐야? 어디 차장 따위가 감히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아 뭐 편하실대로 생각하세요, 본부장님은 제가 팀장하면 잘할것 같다고 하시니"


김팀장님의 자리를 탐내는 차장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자가용으로 본부장님 출퇴근을 시켜주면서 물밑 작업을 무언가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당당하게 나올리가 없지. 사내정치를 하려면 부하 직원들 보다는 윗선에 잘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장이 유리한 상황인데, 팀장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본부장을 언급하자 유독 발끈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마치 몸싸움이라도 할 것 처럼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리는 조금 전까지 울컥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가장 편하게 이기는 방법은 적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라고 했던가?


상황이 더 악화되자 가만히 듣기만 하던 다른 팀장들도 이제서야 나서기 시작했다. 웃긴 점은 하나같이 차장을 질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부장이 무슨 말을 했던지, 넌 차장인데 상급자인 팀장님한테 예의가 없다'는 식이다. 그들한테는 고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보다, 본인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가보다. 뭐 이런 말도안되는 인간들이 다 있지?


언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때, 본부장님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야, 니들 당장 내 방으로 와! 서사원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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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각 팀에서 법인카드를 사용하는 경우 회계팀에 제출해야 하는 영수증과 증빙자료는 서사원이 취합하고 있었다. 단순 반복적인 서류작업이라 회사에서도 정규직이 아닌 파견직 사원한테 시켰던 건데 그게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서사원을 만만하게 생각했는지 개인적인 용도로 법인카드를 사용해놓고는 서류를 조작해서 서사원한테 처리해달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특히, 팀장과 차장은 그 정도가 심했고 서사원이 거부하면 따로 불러서는 폭언을 하고 악질적으로 괴롭히기까지 한 모양이다. 이후 확인된 사례만 해도 수십 건인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팀장은 주말에 법인카드로 마트에서 생필품을 샀으면서 회사 소모품, 다과류를 구매한거니 인정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영수증은 구매내역이 안 나오게 총 금액만 나오도록 발급받고 구매내역은 허위로 만들어냈다. 차장은 개인적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려고 선결제를 수십만 원어치 걸어놓고서는 회의비로 처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공범이나 마찬가지인 셈이긴 하다.

예산을 용도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행사 준비를 위해서 승인된 예산이 1,000만원인 경우 실제로는 비용이 800만원 들었다면 나머지 200만원은 인근 사무용품 판매점, 편의점, 식당, 카페 등에 나눠서 선결제를 몇 십만원씩 해두고 각 팀에서 필요할 때 쓰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법인카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회계팀장도 구색만 맞추면 눈감아주곤 했는데 서사원은 본인의 양심에 어긋나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한테 잘못됐다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혹여나 해고될까봐,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컸나보다.

속으로만 꾹꾹 참다가 견디기 힘든 마음을 다이어리에 기록해 두었는데, 부모님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를 발견하고 경찰과 감사원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이어리에서 서사원을 괴롭힌 팀장과 차장의 비리, 폭언과 욕설도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감사관들이 들이닥쳐서 법인카드 사용내역 등의 서류와 PC를 압수해갔고,

빈 회의장을 조사실로 만들어 수시로 사람들을 호출해서 징계 대상자를 솎아냈다.

이대리는 불려가지는 않았지만 조사실에서 몇 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온 직원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서 나오곤 했다. 무더기 감봉, 정직 등의 징계 조치가 결정되었고 서사원의 죽음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팀장과 차장은 형사처벌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 법인카드로 밥 안사먹은 사람이 어딨어? 왜 나만 갖고 난리야!!"

"거 훈계 몇 마디 했다고 유서나 쓰고 그렇게 가버리는 게 미친X 아냐?!"

"나도 피해자야, 피해자!! 난 진짜 억울하다니까?!"


역시나 이들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억울하다는 당당한 태도에 모두들 경악했다.

그 와중에도 서사원의 다이어리에 본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고 안도하며 웃고 떠드는 직원들을 보고 있으니 이대리는 속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편, 팀장과 차장은 형사처벌이 확정되어 징계 해고를 당하게 되면 재취업에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으니,

자진퇴사를 하려고 사직서를 작성해서는 인사팀으로 질주를 했다.


"이놈의 회사 더러워서 내가 먼저 나간다!"

"오늘자로 때려칠거니까 퇴직금은 내 계좌로 당장 보내!"


그러나, 인사팀에서는 이들을 대기발령으로 처리하고서는 끝까지 사직서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미 늦었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서사원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모두들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법인카드 모니터링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서사원이 수기로 하던 업무는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팀장과 차장은 해고되었지만 이대리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할 거면 진작에 했어야지, 사람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제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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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는 초등학교를 가려면 큰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도 버스정류장이 바로 옆이라 교통은 좋은편인 듯한데요?"


"B생활권은 메인 상권으로 발전할 곳이라 투자가치는 있어보여요!"



아침부터 회사가 시끌벅적하다. 언젠가 사장님이 알려주었던 아파트 청약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대리와 같이 서울에서 이전한 기관의 종사자들은 별도의 물량이 있어서 특별공급 청약신청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공고가 올라올 예정인데 한 번만 신청을 할 수 있다 보니 사람들은 어디가 좋을지, 당첨 확률이 높을지 저울질하느라 업무는 뒷전이고 아파트 이야기에 빠져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리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대출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연봉의 10배가 넘는 금액인데 만약에 당첨이 된다고 한들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발코니 확장, 시스템 에어컨, 기타 옵션까지 포함하면 수천만원이 더 올라가는데 막막해 하는 이대리를 보며 누군가가 조언해줬다.


"아파트 대출은 갚을 생각 안하고 평생 끼고 사는거야. 대출 끼고 살다가 그대로 팔기도 하니까"


"그럼 평생 빛만 갚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인생 잘 살았구나 하고 하늘나라 가는거지 뭐, 이왕 할 거 풀옵션으로 해서 신청해봐. 어차피 빚이 몇 억인데 조금 더 얹는 게 뭐 별건가 하하"


새벽에 잠도 못 이루고 분양공고를 몇 번이며 다시 읽어본 끝에 이대리는 상권이 발전할 것이라는 B생활권에 청약 신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장님이 떠나기 전 조언해준 내용을 생각해봐도 왠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



며칠 뒤, 당첨자 발표날이 되었고 사무실 곳곳에서는 환호성과 탄식이 쏟아졌다.

이대리는 별 기대도 없이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로 몰려들었다.



"이대리도 B생활권 신청한다고 했지? 당첨 확인해봤어?"


"아뇨, 아직이요.. 저는 안될거같아요"


"에이, 얼른 확인해봐봐. 나도 궁금해서 그래"


이대리는 우물쭈물하며 당첨자 조회 사이트에 접속해서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응? 뭐지?"


'당첨내역'이라는 글씨 아래에는 이대리가 신청한 아파트 단지명, 평형, 동/호수 등이 기재된 표가 있었다.


"와! 축하해! 대박인데!"


"저 당첨된거에요????"


"그래! 여기봐. 동호수도 적혀있잖아! 20층이면 완전 로얄층이네!"



사람들의 축하와 환호성에 이대리도 어안이 벙벙해지며 순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기뻤다.


최근 몇 년간 이렇게까지 축하를 받을만한 기쁜 일이 없었는데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행복하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부서에서 평소에 교류가 전혀 없던 직원 몇몇도 이대리를 찾아와 축하인사를 건네며, 본인도 같은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고, 앞으로 이웃사촌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한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채 10분을 가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까지 축하를 받을 일인가...? 연봉 인상률이 물가 상승분보다도 낮은데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하지? 당장 계약금은 어쩌지?


...


얼마 뒤, 당첨자 계약일이 되어 이대리는 연차휴가를 쓰고 서류를 구비해서 모델하우스로 찾아갔다.

계약금 10%는 현금이 필요했는데 청약통장, 적금통장을 깨고 회사 제휴은행에 신용대출을 해서 겨우겨우 채울 수 있었다.


공터에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지나 모델하우스로 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민달팽이 생활을 벗어나 드디어 내 소유의 집이 생긴다는 사실이 전혀 피부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드카펫이 깔린 모델하우스 출입구를 둘러싼 수많은 호객꾼들을 뚫고 지나가다 보니 당첨이 새삼 실감이 났다.

이대리는 '내가 레드카펫을 밟아보는 날이 다 있구나' 생각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아파트 청약된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레드카펫도 깔고 이렇게 야단인가 싶기도 했다.


"당첨 축하드려요! 전세, 월세 매물 내놓으실 거면 연락주세요"


"젊은분 같은데 축하드려요! 이참에 상가도 하나 분양 받으세요!"


"줄눈시공 안하세요? 저희 입주청소도 잘합니다. 지금 예약하면 할인해드려요!"


정신차려 보니 이대리 손에는 명함, 전단지, 휴지, 행주 따위가 가득 차 있었다.


모델하우스 내부는 흡사 공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후끈후끈했다. 볼이 상기되어 일행과 기쁨을 나누는 인파들 속에서 이대리는 문득 쓸쓸함을 느꼈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건가...?' 건물 한 켠에는 당첨자 명단과 생년월일을 익명으로 기재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이대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나이가 어린 편에 속했다.


'젊은분이 어떻게 청약이 되셨대요, 축하드려요. 이전기관 특별공급이시죠 그럼 서류는...' 그렇게 담당자가 안내해주는대로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온갖 문서에 서명을 하고서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 이대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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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청약받는다는건 분명 일생의 큰 이벤트이지만 생각보다 별 일은 아니었다.

계약 이후 중도금은 은행에서 수월하게 대출이 됐고 이대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낼 뿐이었다.


아파트가 다 지어질 때 쯤이면 주택담보대출을 해서 중도금 대출은 상환하고 잔금을 치루면 되리라

입주 시점에도 월급은 지금보다 크게 오르지는 않겠지만 매달 꼬박꼬박 대출 갚으면서 그렇게 살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문득 떠오른 이 질문이 이대리의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라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이대리는 어쩌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방까지 와서 대출금 걱정이나 하며 톱니바퀴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실 지방 이전 이후에는 전체 메일로 퇴사인사를 남기는 직원들이 부쩍 늘었다.


누군가는 외국계로, 누군가는 스타트업으로, 혹은 공기업 근무 경력을 살려서 경영평가 관련 자문을 해주는 업체로 이직했다는 사람도 있다.


이직 경험이 있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막상 부딪혀보면 별거 아니더라”고 말했지만, 이대리는 지금의 안정적인 월급과 이제 겨우 익숙해진 환경이 발목을 잡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김팀장님이 떠난 뒤, 회사는 예전과는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서로를 챙기던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특히 최근의 서사원 사건 이후에는 사소한 일에도 잔뜩 날이 서서 원리원칙만 강조하는 보수적인 조직이 되었다.


예전에는 힘들어도 김팀장님이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 하나 진심으로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퇴근길에 이대리는 문득 ‘이 회사에서 계속 버텨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겼다.


이직 사이트를 켜놓고 여러 채용 공고를 살펴보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익숙한 일상에 대한 미련이 번갈아 마음을 흔들었다.

‘김팀장님이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라”고 했을 것이다.


이대리는 자기소개서를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하며,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도 동료의 고민을 들어주고, 힘들어하는 신입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주며 이대리는 알 수 없는 용기가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괜찮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그래도 내일도 살아볼 만하겠지.”


그렇게, 이대리는 또 한 번,


자신의 작은 일상으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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