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킵고잉 Feb 15. 2022

93. 귀 파주는 의사

또 귀가 문제였다.


오른쪽 귀는 오래된 이명과 함께 청력도 많이 떨어져 반포기상태였지만, 지난 주부터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소중한 왼쪽 귀에도 이명이 느껴졌다.

아아, 이 귀마저 잃는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하필 주말이라 동네 병원도 문을 닫았다.

그냥 집에서 쉴까 하다가... 엄청나게 귀찮지만 응급실에 출동해보기로 한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니까.




코로나로 미어터질 줄 알았던 병원 응급실은 주말이라 그런지 의외로 한산하다. 오미크론 때문에 모두 외출을 안해서인가, 대기도 없이 바로 내 차례다. 응급실에서는 당직을 서는 레지던트에게 진료를 받을 수있으니 윗층 진료실로 올라가보라고 했다.


주말의 병원은 불도 꺼지고 고요하다. 늘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텅 비어있는 모습처럼.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진료실에 들어서니 하루종일 아무도 없는 진료실에서 지루하게 보낸것 같은의사가 일어나며 나를 맞는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의사는 설명을 듣더니 귀 속 촬영과 청력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딱딱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소중한 내 귀를 맡긴다. 내 귀 언저리에서 카메라와 후레시를 들고 부시럭대던 의사, 가벼운 탄성을 내쉰다.


"환자님.

귀지가 너무 많아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귀지를 좀 파겠습니다."



음, 의사가 귀지도 파줬던가? 

모니터를 쳐다보자 허연 바위같은, 수억광년을 넘어온 것 같은 태초의 허연 물질들이 모니터 밖으로 삐져나올 듯 가득했다.  


남의 귀지를 파야하는 극한 직업이라니. 약간의 연민을 가지고 의사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보았다. 한껏 기대에 부푼 의사의 얼굴을. 세렝게티에서 사슴을 바라보는 배고픈 사자의 들뜬 에너지를.

"귀지가 많으면 이명이 생기기도 하죠. 하하하" 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덧붙이면서, 혹시라도 내가 거부할까봐 지나온 다리를 불태우는 단호함을.


의사는 금속의 길고 뾰족한 기구를 내 귀에 들이밀었다. 그 긴 기구를 보자 갑자기 무서워서 온 몸이 굳고 긴장되었다.


"무... 무서워요....."

"걱정마요. 힘 빼요..."


사각사각사각

"자, 이제 하나 나왔어요."


사각사각사각

"하나 더."


사각사각사각사각


사사사사삭


사각사사각사사사사삭각각...


사각사ㄱ....


으음… 내가 잠들었던가?

"다 끝났습니다."


귀지를 파는 정성에 비해, 이후에 따라온 청력검사나 사후 서비스는 그냥 저냥이었지만, 그동안 의료진의 무관심에 익숙해진 나에게, 응급실의 의사는 누구보다도 친절했다.

귀지에 진심인 의사, 그는 귀지성애자였을까, 응급실의 슈바이쳐였을까.

 

불행은 모든 귀지를 판 이후에도 이명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행은 청력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92. 움짤 이모티콘 연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