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처음 기차를 탈 때 누가 옆에 앉을까 기대하곤 했다.
멋진 남자가 앉는 건 아닐까…
두런 두런 이야기 꽃을 피워볼까.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단 한번도 멋진 남자가 옆에 앉는 운좋은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후덕한 아주머님이나 아저씨인 경우가 많다 (물론 나도 후덕한 아줌마이니 아줌마 아저씨 비하발언은 아님).
기차를 자주 타는 이제는 더이상 기차를 타며 누가 옆에 앉을까 기대하는 경우가 없다. 대부분 옆 자리가 빈 자리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누가 앉으면 남녀노소를 떠나 약간 실망할 뿐이다.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기차를 탔는데
놀랍지도 않게 아줌마 파마를 하신, 그러나 할머니에 가까운 분이 타고 계셨다.
다만, 창 쪽에 앉으신 그 분이 복도 쪽의 내 자리 바닥에 가방을 두고계셔서,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치워달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서 있었다.
내 상상 속에서 그 분은 가방을 치워버리지 않고, 슬쩍 옆으로 밀어두어 나는 기차 타고 가는 내내 불편하게 양 발을 한 구석으로 붙이고 가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었던 듯도 하다.
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가방…”이라고 한마디를 더 보태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꽤나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번쩍 들어서 자신의 앞 선반에 옮겨 놓으셨다.
“아이구 이걸 잊어버리고 잇었네~”
오, 나는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
나의 공간을 지켰다. 흐흐흐.
그리고 난 귀에는 이어폰, 눈은 스맛폰을 향한 채 나만의 시간에 빠져들려는 찰나,
“어디 가요?”
갑자기 그 분이 말을 걸어왔다.
“예??”
“어디 가요?”
수없이 기차를 탔어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난 당황하여 대답했다.
“서어.. 서울요!”
그랬더니 그분은 대답했다.
“아~ 나는 동탄 가요~~”
아, 네.. 흠….
그리고 다시 스맛폰으로 향하는데,
“아유 이번엔 아가씨가 타서 좋으네~~~ “
네? 아가씨요???
이제는 화장으로 가릴 수도 없이, 완연한 나의 나이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하하하, 네에~”
황당함에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 그 순간만은 짐짓 아가씨인 척 대답을 하였다. 그랬더니 그 분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아 글쎄, 지난 번에는 옆자리에 아저씨가 탔는데, 계에속 말을 거는거야~~~”
아, 허허허, 네~~~
“처음엔 대답을 해줬는데 어찌나 말을 계속 걸던지, 결국 나도 하기 싫어서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랬더니 눈치를 챘는지 더이상 말을 하지 않더라구 “
아 네~~
조금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분도 나의 침묵이 이상했는지,
“그런데 가끔은 그럴 수도 있어~~~. 말.걸.수.도 있어~”
나는 스맛폰을 계속 보았고,
그 분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의 단호한 침묵에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은 할머니는 갑자기 부시럭 부시럭 무언가를 꺼내었다.
가만 보니 노트를 꺼내었는데, 노트 안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그녀의 일기장으로 보였다.
그 분은 기차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가 일기 쓰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
예전에 보았던 할머니의 맞춤법도 다 틀리던, 웃기던 못난이 글씨.
지금은 엄마의 마음 아픈 못난이 글씨로.
무슨 무슨 약을 먹었다는 내용.
어디에 갔다 왔고, 시간을 맞춰 몇시 기차를 타기로 했으며, 어젯밤 잠자리가 딱딱해서 매우 불편했다는. 오른쪽 면에 할머니는 삐뚤삐뚤 또 무언가 글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일기 몇 줄을 엉겹결에 본 나는,
갑자기 그 할머니가 좋아졌다.
어딜 가든 메모를 하시는 메모광 아빠,
지금은 건강이 안좋아지겨서 더이상 쓰지 않지만, 어디든 공간만 있으면 가계부 한 귀퉁이에 늘 일기쓰기를 즐겼던 우리 엄마.
그 할머니는 내게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후 동탄역.
평소같으면 몸만 살짝 옆으로 틀어서 내릴 공간을 만들어주었을텐데, 난 그녀가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내리면서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아유 잘가요~~~”
나도 그녀의 뒷모습에 크게 이야기했다.
“네~~~조심해서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