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런던에 있다.
해외여행을 가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남들이 일할 때 놀아야 재미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은 친구는 발신번호를 보고 외국이냐고 물었고,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 친구가 평소 가고싶다고 노래하던 '쿠바'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평소 조신함을 최대의 미덕으로 생각하던 친구의 방정맞은 웃음이 귀청을 때린다.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하다. 내가 런던에 있다고 정정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하긴, 쿠바에 비하면 아무리 매력적인 런던이라도 평범한 도시일 뿐이지 않은가.
"미안. 나 사실은 런던이야 ㅎㅎ"라는 소리에 달망대던 친구의 목소리는 어느새 얌전해지고, 전파를 타고 알 수 없는 실망도 함께 전해진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만의 쿠바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자신은 못 가더라도, 누군가는 가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차마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래서 같은 회사를 다니던 선배 언니가 회사를 그만두고 정말로 만화가게를 차렸을 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열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쿠바나 만화가게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2주짜리 휴가는 평범한 회사원인 나에게 실행 가능한 최대치의 일탈이었다. 1년을 꼬박 일해야 앞뒤 주말을 껴서 최장 9일의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직장인에게, 2주짜리 휴가라니, 이것은 직장인 포르노나 다름 없지! 우후후훗!
개처럼 모아서 황제처럼 쓴다는 연차 2주!
그래서 탈모에 이어 돌발성 난청까지 생겨버린 어느 날, 회사를 때려치고 미친 야근의 사슬을 끊기로 결심하고나서 내가 가야할 곳은 스페인이었다. 이미 많은 여행작가들이 찬탄에 찬탄을 거듭하지 않았나. 스페인, 너는 자유라고. 혹은 인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고. 그렇게 휴가를 냄과 동시에 대책도 없이 런던을 거쳐 스페인 세비야로 가는 비행기표를 덜컥 끊어버린 것이다.
아는 스페인 말이라곤 세뇨리따, 아디오스 밖에 없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