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여행기는 계속되는 폭풍야근으로 탈모에 이어 돌발성 난청까지 생기게 되자, 이직을 결심하고 떠났던 유럽 여행 기록입니다.
세비야에서 광란의 나이트투어를 경험한 후, 나는 네르하 (Nerja)로 갔다.
정체 불명의 나이트투어에서 에너지를 다 써버렸기 때문일까, 혼자 하는 여행의 쓸쓸함 때문일까. 어쩌면 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옆 건물 벽 뿐인 싸구려 호텔에 염증이 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남부의 아름다운 해안도시에서 여행 의욕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유럽의 발코니라는 아름다운 풍광도, 지중해의 햇살도 시큰둥했다. 그래도 호텔방에만 있을 수 없어서 뭐라도 보자는 생각으로 나서보기로 한다. 여행도 목표지향적으로 해야 맘이 편하니까.
이 곳에 파라도르가 있다고 하니,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파라도르 구경에 나섰다.
(*파라도르: 오래된 성을 고쳐 만든 고급호텔)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을 발견한다.
네르하의 바다, 햇살, 사람들, 그 모든 아름다움을 다 합쳐놓아도 이 호텔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곳에 묵으면 예산 초과였지만 사람이 뭐, 계획대로만 살 수는 없지 않나. 오늘 숙박 예산을 초과하면 내일 예산을 아끼면 된다. 그래도 예산을 초과한다면, 그래, 초과하면 된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던 터라 겁나는 게 없었다.
누구나 헝그리한 사람에게는 조금은 연민을 갖게 마련일까. 초라한 여행객의 모습으로 "How much per night? Any discount?"을 묻는 배고픈 나에게, 프론트에서는 이미 끝난 프로모션의 이벤트 특가까지 적용해서 방을 내어주는 자비를 보여주었다. (불쌍해보여도 상관 없다. 땡큐!)
조금 전까지는 가난뱅이 여행객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빈티지 패션을 사랑해서 일부러 초라하게 차려 입은 부자 여행객으로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후훗...
게다가 이곳에는 지중해의 햇살이 아름답게 내리꽂히는 정말 훌륭한 수영장이 있었으니, 아아, 이 호텔의 모든 시설을 즐겨주리!
나는 재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아름다운 수영장으로 갔다.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물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늘 그렇듯 외국인들은 선베드에서 책을 읽으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구경할 시간이 없다. 전투적인 자세로 아레나 수영 안경을 장착했다. 이 호텔에서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이 나를 수영장에서 전력질주하게 만들었다.
머리를 물 속 깊이 박고 물을 튀기며 질주하는 자유형. 하늘을 찌를 듯 팔을 쭉쭉 뻗어올리는 배영. 대한독립만세 자세이긴 하지만, 나비처럼 쏘는 버러플라이... 왠지 일광욕을 하는 외국인들도 나의 수영에 경외감을 표하는 것 같다. 나 수영 좀 한 사람이라니까!
그러나 나는 미처 몰랐다.
곧 그 평화로운 수영장에서 사.. 사람살려~!! 소리치는 인물이 버터플라이까지 하던 내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 수영장의 미친 깊이는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