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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일 Jan 27. 2022

청춘,

우리는 어리고, 아리고, 여렸다.

 


스미노 요루(住野よる),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청춘이라는 단어에 설레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는 막연한 동경심으로, 지났을 때는 막연한 그리움으로 몽글몽글 사색에 잠기곤 한다. 스미노 요루는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라는 작품을 통해서 대학의 청춘을 담담하지만 비참하게, 비참하지만 당당하게 그려냈다.


 누군가의 삶의 흐름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믿는 바를 향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겨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 이 둘은 상극된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상을 위해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현실을 위해 이상을 꿈꾸기도 한다. 누군가가 너무나도 이상적이라고, 현실적이라고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이상적일 수 없고, 현실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의 무대인 대학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다. 필자 또한 나이는 조금 있지만 대학생이라는 명찰을 떼지는 않은 상태이다. 서로의 의견을 교차시키며 교차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것들을 배운다. 물론 이런 과정들이 서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참으로 아름답겠지만, 서로를 험담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려 하는 경우에는 그 의미는 시커멓게 타들어가버린다. 의미 없는 숯검댕이로 타들어가며 가장 위험한 상황은 한 사람의 이상이 완벽하게 좌절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상실’이라는 과정을 뼈저리게 느낀 후 주도적으로 지내기는 쉽지 않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두며 자신의 안전 영역을 확보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는 숯검댕이가 된 주인공이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라는 일념 하에 시작된다. 자신과 함께했고,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지만, 결국은 일방적 애증의 관계로 바뀌어버린, 죽어버린 한 사람을 일깨우고 싶어 한다. 변해버린 사람을 되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주인공은 ‘청춘’을 되찾고 싶어 사활을 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 했던 그 시절은 정말로 소중했기에 더럽혀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누구보다도 상실이라는 과정을 깊게 느껴왔기 때문에, 변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에서 느꼈던 이상의 행복감만이 남아있었을 뿐, 이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이 불행은 주인공이 과거 맛보았던 ‘청춘의 삶’에 집착하며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돌이켜 보면, 책의 주인공과 필자가 비슷한 면이 정말로 많았기 때문에, 감정 하나하나에 이입하며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필자인 ‘나’ 또한,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 행동을 취했던 기억이 있다. 이미 틀어져버린, 이미 멀어져 버린 사람들과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헛된 소망을 품은 채로 몇 년을 흘러갔던 기억이 있다. 나의 망가져버린 이상을 되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는 말이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정 나 자신이 원했던 것은 추락해버린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면 된다고 마음 한 구석에서 굳게 믿은 채로 걸어 잠가놓았을 수도 있다.


 지나간 청춘은 되돌릴 수 없다.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사람들의 기억이나 습관에 아로새겨진 역사는 다시 쓸 수 없다. 상실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단지 그 시절의 자신을 곱씹으며 찬찬히 복기하는 것뿐이다. 기억 속 역사에서 내가 어떤 인물로 기록되었는지, 정말로 나 자신이 그랬는지. 쭉정이만 남을 때까지 곱씹다 보면, 그 마지막 찌꺼기가 결국은 간신히 한 발짝 내딛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물론, 전진한 후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청춘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법적으로 성인이 된 후로부터 자신의 이상이 무참히 박살나버리는 시점까지를 의미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철없고 감정에 모든 것을 맡긴 채로 살아가던 그 시절, 어쩌면 너무나도 무책임했을 수도 있는 그 시절. 하지만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그 시절을 우리는, 청춘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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