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기일 Mar 04. 2020

알 바가 끝나고.

끝이 났습니다. 얼마 하지 않던 알바지만, 끝을 보았습니다. 


             정치라는 것에 어떻게 입문해야 할까 항상 고민했습니다. 아무런 지지 정당도 없기도 하고, 어느 정당을 섣불리 들어가기도 싫다는 마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사실 싸우고 그런 모습을 보면 흥미가 싹 가시기도 했단 말이죠. 제 신념과는 동떨어져 있는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맨날 방에 틀어박혀서 글 쓰는 것 빼고는, 하고 있던 게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는 형과 연이 닿아 저에게 도와 달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이런 소중한 기회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선거 일을 학생회에서는 많이 해봤지만, 사회에서의 선거 일을 돕는다는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죠. 아마 다시는 하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정말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이 따뜻하다는 제 생각을 부수기엔 충분한 인간상들이었죠.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그리고 머리싸움 또한 제가 생각하는 이상과는 달랐었죠.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누군가에게 비판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토론의 자세와는 많이 달랐기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죠.


             어느 프레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세계를 그 틀에 맞춰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제 세계관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죠. 하지만, 제가 경험한 프레임은 너무나도, 제 생각과 다른 세상이었기에, 경험했던 일련의 일들이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다른 프레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에 있으면서 다른 프레임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면, 배우는 것도 많겠지요. 하지만, 역으로 저는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그 프레임 안으로 편입될까 봐, 그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어느 한 프레임에 갇혀 있기 싫었고, 수많은 관점들을 자유롭게 오가며 상상하는 것이 특성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이 영역의 사람들은 철저히 프레임의 논리대로 흘러가는 집단이었기에 그 특성이 상충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라는 주제는 상당히 골치가 아픈 주제입니다. 정치의 역사를 꿰고 있었다면 어떤 다른 해석을 내놓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저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난무하는 이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를 말하면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에서 파생되는 둘과 셋이라는 주제가 다시 튀어나옵니다. 둘과 셋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하면, 넷과 다섯이 어느새 뛰쳐나와 자신들에게도 관심을 달라며 외치고 있죠. 이 정치라는 하나의 단어는, 이 체계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모두 망라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온전히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그 분야를 맡습니다. 각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죠. 정당이 가진 색깔이 아닌, 자신의 분야에서의 색깔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분야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동한 하나에 의해서 다른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한 상황이 나오곤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항상 완벽하지 못하고, 전지전능하지 못한 결과물을 내놓는 인간입니다. 


             빨갱이, 애국보수, 꼰대 등등. 서로를 폄하하는 표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가 이번에 경험한 대한민국은,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여긴다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면, 꼰대,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고 싶다면, 아마도 현재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일말의 동정의 여지라도 보이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깨문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가장 편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혹시 대깨문이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단정 짓고 행동해버리는 순간, 세상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린 사람이 되기 마련이거든요. 사실 대깨문이나 태극기 부대 같은 단어들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갇혀 극도로 자신만의 사상과 신념이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비꼬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겠죠. 대깨문 같은 단어는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사용되던 단어라고 알고 있지만, 현재는 그 정반대의 선상에 위치해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혐오의 표현은 극단적인 편 가르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대깨문이라는 단어를 분노에 차서 내뱉는 사람들 중, 태극기 부대라는 단어를 비꼬면서 내뱉는 사람들 중, 그 반대 프레임의 선상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상당히 꽤 많은 분들께서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라는 느낌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갈등이 없다면 발전도 없다는 말, 극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갈등과 함께 발전이 있으려면 모두가 서로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타협점을 찾아 나가야 발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 뛰어 보니,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발전의 의미가 조금 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서로의 말을 온전히 듣는다는 것은, 이상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당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자신들이 믿는 방향으로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권력 투쟁을 하는 것 아닐까요. 만약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끌어 나가다 문제가 생기면, 그 점에 대해서는 상대가 지적하고 고쳐 나갈 것이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에서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러한 양상은 끝없이 계속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발전의 방향일 것이고, 서로의 의견을 온전히 들으면서 발전할 수 있는 세상은 아마도, 유토피아에도 없을 세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권력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대보다 ‘잘나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 이쪽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잘나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고, 음해하는 것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주먹질을 하고, 언성을 높여 싸우며,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쇼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들이 정말 멍청하고 감정 조절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련의 행동들이 하나의 각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나는 동안, 사람은 필연적으로 변하게 되어있나 봅니다. 그 집단 안에 들어가 활동을 하다 보면, 초심을 잃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게 되죠. 한 배를 탔기 때문에 다 같이 비슷하게 변해가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원래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싸움에 더욱 집중을 하다 보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이상은 어디에 남아있을까요. 눈 앞의 것들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다른 것을 잊어버리기 마련이겠죠. 권력을 일단 잡아야 하니, 함께 사는 세상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되지 않을까요.


             정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사실 아직도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누군가가 잘못했고, 누군가가 잘했다 정도를 어떠한 지표를 보면서 지레짐작을 할 수 있는 아주 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며 보았던, 정치라는 큰 무대의 편린만 해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경험이었습니다. 저와 정치색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이익 앞에서는 얼마나 가벼울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서, 그런 점이 더 부각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람을 장기짝처럼 쓰고, 그 장기짝을 내칠 때는 너무나도 무책임한 말 한마디로 버리는, 그러면서 자신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주르륵 연설을 늘어놓는 그 모습이 더욱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것 아닐까요.


             청년들이 정치에 대해서 사실은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도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인터넷만 봐도,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정말 관심이 많은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얼굴을 맞대고는 정치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는 항상 갈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터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죠. 청년들이 관심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긍정적인 지표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참여가 많아졌다는 것이 긍정적인 지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이 사회는 그러한 신념에 대해서 공유하는 것도 위험해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 토론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며 자란다고. 맞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며 자라죠. 그렇다면, 서로를 물어뜯는 그런 권력투쟁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어떤 모습을 배울까요. 어른조차 그렇게 만든 우리의 사회가 문제인 걸까요. 아니면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든 어른들이 문제인 걸까요. 서로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모습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젊은 청년들은 어떤 것을 배울까요.


             이렇게 그냥 쓰다 보니, 제가 정말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꿈꾸던 세상과 현실은 많이 달랐으니까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건전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사회. 여기서 ‘공유’와 ‘건전한’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이번 경험은 꽤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모르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절대로 그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행연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 앞으로도 저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은 의도로 비판하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비난하고 있을지도 모를 저를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눈을 감기로 했습니다. 


    눈을 감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싶네요. 그래도 혹시나 웃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매거진의 이전글 인스타그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