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저리다. 아까부터 오른손 중지와 약지가 찌릿했다. 버텨보려 했지만 안 되겠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타이핑을 멈춘다. 허공에 손가락을 툴툴 털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고 머리를 뒤로 젖히는 순간 목에서 ‘뚝’하는 소리가 난다. “악!” 조용한 사무실에선 ‘악’ 소리마저 숨을 죽이게 된다. 목 언저리를 대강 주무르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마감이 코앞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니터 우측 모서리에서 메일 알림창이 쏙하고 올라온다. 불길하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메일을 연다. 보낸이는 강 부장, 제목란에는 ‘번역팀 전원 3시에 회의실로’라고 적혀있다. 내용 칸은 비어있다. 바빠 죽겠는데 회의야.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회의는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텐데. 그동안 못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해두려면 집중, 집중해야 한다. 저린 손가락을 더 바삐 움직인다.
3시. 팀원들은 하나둘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도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세운다.
“전무님이 번역 외주를 대폭 줄이라고 하셔.”
강 부장이 말한다. 나는 정신이 아찔해진다.
번역 의뢰가 쏟아져 들어오면 팀 내부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럴 때는 하는 수 없이 외주를 맡긴다. 감사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일 폭탄이 터진 지 벌써 몇 달째다. 전무는 일이 많아지면 얼굴에 화색부터 돈다. 하지만 외주는 다른 문제다. 전무는 때때로 강 부장을 통해 외주 처리를 문제 삼았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벼르고 별렀나 보다. 외주를 ‘대폭’ 줄이라니.
강 부장이 말을 잇는다.
“번역팀 인원이 적은 것도 아닌데 왜 내부에서 해결을 못 하고 외주를 주냐고. 앞으로 외주는 웬만하면 안 주는 쪽으로 하라셔.”
그러곤 팀원들 눈치를 슬쩍 살핀다. 난 다급하게 말한다.
“같은 번역팀이라도 실질적으로 번역을 하는 인원은 얼마 안 되잖아요. 이 인원이 들어오는 일을 다 처리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 ”
“외주비가 점점 늘어서 전무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 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가로챈다.
‘일을 기분으로 하나?’란 말은 삼킨다. 대신 말한다.
“지금도 저희 야근에,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는데… 저희도 외주를 주고 싶어서 주는 게 아니라 처리를 못 할 상황이라 주는 거잖아요.”
강 부장은 거슬린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긴다. 회의실엔 날카로운 적막이 흐른다. 팀원 중 누구 하나라도 같이 나서주길 바라지만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다. 강 부장은 ‘거봐. 너만 항상 시끄러워’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해서 답한다.
“일을 여유를 부리면서 하니까 그렇지. 처리를 왜 못해. 무조건 못한다고만 하면 뭐 어쩌자는 거야.”
뭐 여유?! 속이 부글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난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팀원들을 바라본다. 여전히 조용하다. 누구는 무념무상의 얼굴로 빈 책상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고, 누구는 죄인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고, 또 누구는 손톱만 만지작거린다. 나만 속이 타는구나. 답답한 사람들.
이쯤 되니 나도 전의를 상실한다. 더 이상 얘기해봤자 내 이미지만 사나워질 뿐 얻을 게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강 부장은 애초에 들을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도 모른다. 회의가 아니라 통보를 위한 소집이었던 거지.
나까지 입을 다물자 강 부장은 그제야 편안한 얼굴이 된다. 다른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말하곤 “자 그럼 가서 일하자고”라며 펼쳤던 노트를 덮는다. 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팀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숨이 막힌다. 회의실 공기가 유난히 탁하게 느껴진다.
강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휴우~”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자기도 힘들어 죽겠다는 듯. 속이 너무 보여 나는 더 크게 “후우우~”하고 길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랬다간 미운털이 제대로 박히겠지.
앞서가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왜 말이 없을까. 앞으로 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런저런 추측을 해본다. 불만은 있지만 이렇다 할 의견은 없어서? 눈치를 보느라? 괜히 나서서 밉보이기 싫어서? 만사 귀찮아서? 모르겠다. 힘들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그 정도 말도 못 할 만큼 몸을 사릴 이유라도 있나. 하긴 이들이 언제는 앞에 나서서 정확한 자기 의견을 낸 적이 있던가. 뒤에서만 구시렁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