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과 진정한 나 사이에서
최근 개그우먼 이수지가 특정 동네 엄마들을 패러디해서 화제가 됐다. 우아해 보이는 말투에 고가의 패션 브랜드, 뜨거운 교육열까지. 완벽한 재현이라며 재밌어하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조롱이라며 불편함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이수지가 착용한 패션은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몽클레어 패딩과 샤넬 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사람들은 몇몇 다른 아이템까지 보태며 해당 동네 엄마들의 특징을 더 자세히 나열했다.
패러디 영상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몽클레어 패딩을 입기 꺼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쩐지 패러디의 대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몽클레어를 보내네. 몽클 제삿날이네’라는 표현을 썼다. 다음 편에서는 몽클레어와 샤넬 대신 밍크퍼 베스트에 고야드 가방을 들고 나왔다. 사람들은 말했다. ‘몽클 안 입고 다들 밍크 꺼내 입었다는데 밍크도 안녕인가. ㅋㅋㅋ’ ‘이번엔 고야드를 보내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포인트에서 재미가 있었다. 특정 동네라고는 하지만 말투나 패션 심지어는 교육에 관한 열정까지 어떻게 비슷할 수가 있을까. 옆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아는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고 남의 삶에 관심도 없고 묻는 것조차 꺼리는 시대 아닌가. 이 동네만 특별히 다들 알고 지내는 것도 아닐 텐데. 잘 안다고 해도 생각과 취향이 같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각자의 선호나 취향이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라면 패러디가 신경 쓰였을까. 몽클레어가 가볍고 따뜻하고 디자인이 맘에 들어 입고 다녔다면 굳이 남들 시선을 의식할 이유가 있을까. 고야드 가방이 패러디에 쓰였다고 그걸 안 들고 다닐 이유가 있냐는 말이다.
매주 모여 같이 공부하는 지인이 있다. 그분은 얼마 전에 밍크퍼 베스트를 당근에서 싸게 구매했다며 좋아했다. 인조인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하다며 만족해했다. 두 번째 영상이 올라오고 밍크가 주목받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다. 그분은 이 얘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추측컨대 “뭐야. 난 그래도 입을 건데?”라고 하지 않을까. 몽클레어가 화제가 됐을 때 누군가는 이런 반응도 보였다. “몽클은 유행 지나서 지금 그 동네에선 아무도 안 입는데” 본인이 더 정확히 안다는 듯. 마치 이젠 몽클을 입으면 안 된다는 듯.
몇 년 전부터 ‘나답게’나 ‘나다움’이란 말이 눈에 띄더니 이젠 좀 식상해졌을 만큼 많이 보인다. 여기저기서 나다움을 외치지만 어쩐지 점점 더 나다움은 사라지고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비슷해지는 기분이다. 뭐 하나가 인기를 끌면 어느새 SNS에는 비슷한 것들이 넘쳐난다. 마치 그걸 모르거나 동참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 같다. 어떤 교육 방식이 좋다더라 하면 너도나도 따라 하기 바쁘고 어느 학원이 인기라더라 하면 곧장 우르르 몰려든다. 사람들이 좋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하는 심리리라.
이수지의 패러디 영상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각자는 자기 취향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돌아보니 다 비슷비슷하다는 건 어쩌면 개인의 취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사회적 시선 때문에 취향을 포기한다면 그건 진정한 나다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도 많이 보다 보면 정이 들 듯 물건도 그럴 수 있다. 주변의 결정에 생각이 흔들리기도 하고, 자주 보는 이의 말투를 닮아가기도 한다. 그건 또 그 나름의 ‘그다움’일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나다움’이란 것도 유행처럼 변하나? 마치 몽클이 더 이상 유행이 아니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어제의 나다움이 오늘의 나다움과 다르다면, 나다움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변화하는 과정인 걸까. 아니면 어떤 순간의 ‘나’를 진짜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오류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내가 지향하는 가치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변한다면, 과연 그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짜 나’란 존재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쩌면 나다움은 고정된 허상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다움을 추구하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를 점점 지우는 건 세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로지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울수록 개인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처럼. 창의적일 수 없는 조직에서 더 창의적 사고를 강조하는 것처럼. 나다움이 강조되는 건 어쩌면 그만큼 나답기 어려운 사회라는 방증은 아닐까.
SNS도 그렇다. 겉으로 진정성과 자연스러움 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은연중에 사람들은 보기 편하고, 거슬릴 것 없고, 이왕이면 예쁜 것을 찾는다. 그럼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평소처럼 보이는 연출된 영상과 사진만 남는다. 나다움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위 내의 나다움만이 환영받고, 세상 흐름과 다른 방향이거나 기존의 틀을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걱정을 가장한 비난과 때론 비호감마저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점점 더 우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진정한 나다움보다는 나다워 보이는 이미지에 관심을 모은다.
이수지의 패러디가 한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밍크를 입네, 못 입네, 할 때. 개그우먼 김지혜는 자신의 인스타에 논란 중인 밍크퍼 베스트를 입고 집안일을 하는 영상을 올렸다. 배경엔 고야드 가방이 살짝 보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수지야, 나 이제 이거 못 입는 거니?” 반응은 뜨거웠다. 몇몇 일반인은 고상한 엄마의 특징이 되어 버린 “… 하지 않아요.”하는 말투와 비교해서 “이노무 시끼. 다시 할 거야 안 할 거야!”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담은 영상을 올려 웃음을 짓게 하기도 했다.
우린 어떻게 나다움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다움이라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나다움은 정말 나다움일까. 내가 아는 나는 정말 나일까. 어쩌면 진정한 나다움이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하는,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너무 휘둘리지 않되, 나의 변화마저도 부정하지 않는 것.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다를 수 있음을, 그러면서도 그 흐름 속에 일관된 무언가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김지혜의 "수지야, 나 이제 이거 못 입는 거니?"라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닌, 우리 시대의 나다움에 대한 가장 솔직한 질문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