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페의 어느 노부부로부터

by 김자옥

얼마 전 카페에서 한 노부부를 봤다. 할머니는 치매증상이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챙기며 불편한 건 없는지 묻는데 할머니는 허공만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어이구”하며 답답하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뱉는 말과 달리 할머니를 살뜰히 챙겼다.

이들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전에도 같은 카페에서 비슷한 모습을 봤다. 둔한 몸짓으로 할아버지는 할머니 자리를 살피고 의자를 빼 주고 햇볕 상태를 체크했다.


둘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비록 지금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의지하지만 예전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많이 의지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말이 많았을까. 할아버지는 잘 들어줬을까. 할머니는 지금 할아버지가 곁에 있어 따뜻할까, 아님 그래도 외로울까.


할머니의 속사정과는 별개로 난 할머니가 부러웠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한없이 어렵기도 하다. 특히 살면서 별로 기대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치아가 약했던 난 어린 시절 치과를 자주 다녔다. 한쪽 어금니를 치료하면 다른 쪽 어금니가 말썽을 부렸다. 나를 치과에 데려가려면 엄마는 따로 시간을 내야 했다. 더불어 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저녁이면 엄마는 아빠에게 나를 데리고 치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저게 아주 돈덩어리야. 돈덩어리.” 죄책감에 더해 수치심까지 몰려왔다. 그 후론 엄마를 성가시게 하거나 돈이 드는 일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했다. 오히려 더 굳어졌다고 해야 할까. 도움이 필요한 순간, 도움을 받으면 훨씬 수월할 일에도 난 꾸역꾸역 혼자 해결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내 모습에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도와달라고 하죠. 우리가 그런 말도 못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난 “다음엔 꼭 얘기할게요”라고 하지만 매번 비슷하다. 혼자 끙끙거리며 간신히 해내거나, 하다 하다 안 돼 뒤늦게 "이것만 좀"이라며 겨우 부탁하거나.


내가 이렇다 보니 나와 달리 쉽게 부탁하고 편하게 기대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특히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내지는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남에게 의지하는 경우를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떻게 저러지? 생각이 없나? 안 창피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안다. 이 불편함과 비난은 실은 나도 편하게 기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나는 뭐든 혼자 해내느라 힘이 드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할 수가 있어'라는 질투라는 것을.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남이 나에게 쉽게 기대는 것도 편치 않으니 난 늘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딱 좋아. 더 가까워지면 피곤해, 라며 스스로를 달래지만 마음 안쪽엔 외로움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로움의 자리는 커져간다.


카페의 노부부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후에 난 편히 기댈 사람이 있을까. 그때라고 지금과 크게 다를까. 자리를 봐주고 햇볕의 상태를 체크해주지는 않아도 “요즘 어때?” 하고 가끔씩 서로의 기분을 살피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앞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상사에게서 엄마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