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뒤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직장 내 따돌림

by 김자옥

[앞 글에 이어]


“양 팀장은 뒤에서 내 얘기 엄청 하고 다녔나 보네.” 난 슬쩍 영서를 떠봤다. 당황하는 영서의 눈빛에서 상황이 어땠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이번엔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니 오죽했겠어? 내가 사표도 냈겠다, 여기저기에 자기가 잘랐다고 떠벌리고 다녔겠지. 참, 사람이….”

영서는 나지막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잖아”라고 했다. 마치 자기는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처럼.

둘 사이엔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영서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부장도 부장인데 요즘 젤 얄미운 건 ‘박’이야. 너 나가고는 완전히 제 맘대로야.”

나와 영서, 박은 동갑에 직급도 같았다. 하지만 박은 이 회사에 거의 터줏대감처럼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늘 위에 있는 입장을 취했다. 대놓고 나서는 법은 없어도 누군가 의견을 내면 “그거 옛날에도 다 해봤는데 반응 안 좋았어.” 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오래된 만큼 윗사람들과도 친분이 쌓였고 그들도 박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였다.

양 팀장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요령과 눈치가 부족한 양 팀장은 때때로 무턱대고 박의 편을 들어 뒷말이 나오게 했다. 박은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런 박이 얄미울 때면 나와 영서는 박의 이름은 생략하고 그냥 ‘박’이라고만 불렀다. 그게 어느새 죽 이어졌다.

이미 영서의 말에 시큰둥해진 난 “그래?”하고 의미 없는 대꾸를 했다. 영서는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님 알면서도 무시를 하는 건지 다시 흥분하며 자기 얘기를 이어나갔다.

“어. 완전! 출퇴근 시간도 말도 없이 바꾸고, 일도 자기가 편한 것만 하려고 한다니깐. 진짜 기가 막혀서.”

“양 팀장은 가만히 있고?”

“자기도 제멋대로인데 뭐. 둘이 아주 가관이야. 그러니까 일이 나한테만 몰리지. 아, 진짜.”

“중간에서 태클 거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아주 신났나 보네.”


그랬다.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건 늘 나였다. 박은 가끔가다 엉뚱한 제안을 했다. 말로는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듣고 보면 자기에게만 유리한 얘기였다. 다들 눈치만 보고 머뭇거릴 때면 내가 나서서 “그건 좀 아닌 것 같아”하며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럼 그제야 다들 '차라리 그게 낫겠다'며 의사 표시를 했다. 양 팀장의 경우도 그랬다. 부당하거나 무리한 지시를 내릴 때면 내가 나섰다. 박은 우리 앞에서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호들갑은 떨어도 정작 팀장 앞에서는 눈치 살피기에 바빴다. 영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속만 끓이고, 나머지는 아래 팀원들은 목소리를 내도 ‘징징거림’으로 받아들일뿐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러니 내가 나설 수밖에.

내가 있어 편했던 줄도 모르고 양 팀장 편에 서다니. 한심한 인간들이란. 아무튼. 양 팀장과 박에게는 내가 거슬리는 존재였을 텐데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이젠 자기들 세상처럼 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와서 하소연하는 영서가 더 이상할만큼.


영서는 다시 침울해졌다. 그러곤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치를 살피며 주뼛거렸다. 잠시 후 영서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근데 너 혹시…. ” 영서가 말을 꺼내다 망설였다.

“뭔데?”

“전무님 찾아가서… 그… 양 팀장 얘기 했었어?”

“내가?” 난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양 팀장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 일하기 힘들다고...”

황당했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입이 벌어졌다.

“아니. 전혀. 말도 안 돼.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영서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박이...”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박이? 박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다는데?”

“양 팀장이 직접 그랬대.”

“말이 돼? 아무리 속이 없어도 자기가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하냐?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영서는 우물쭈물했다. “좀 이상하긴 했어. 그런데 박이 너무 확신에 차서 말하니까…”

“그래서 다들 믿었고?”

영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양 팀장에게 들은 말이 아니라 박이 꾸민 거네. 바로 알겠는데 그걸 믿었다고?”

영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 처음엔 의심했는데 나중에 A팀 김 부장까지 나서서 네가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김 부장?” 여기서 김 부장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충격이 컸다. 평소 이성적이고 나름 공정하려고 애쓰던 김 부장까지 합세하다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하며 앞장서던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내게는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박 얘기만 들은 채 편가르기에 앞장 설 수가 있는지. "김 부장은 또 누구한테 들었다는데?"

영서는 자신없는 목소리도 답했다.

“그건 모르겠고”

“모르긴 뭘 몰라.”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박한테 들었겠지. 박이 평소에 김 부장 떠받들면서 뭐만 있으면 쪼르르 김 부장 찾는 거 몰라?”

영서는 이제야 사태가 파악된 듯 난감한 얼굴을 했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퇴사 후에도 많은 게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팀장이란 사람이 나서서 팀원들 사이를 이간질한 것도, 팀장 한 마디에 다들 돌아섰다는 것도. 가운데에 박이 있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내가 따돌림을 받을 때도, 사표를 낼 때도 줄곧 자기랑은 상관없다는 듯 조용하던 박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고 있을 줄이야.

영서가 이제야 날 찾은 이유를 알겠다. 처음엔 나만 빠지면 별문제 없을 거라 여겼겠지. 하지만 점점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꼈을 거고, 그제야 의심이 생겼을 테지. 그러곤 점점 불안해졌겠지. 자기가 모르는 뭐가 있나? 하면서.

영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젠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긴 꽤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지금껏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박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론 ‘설마’를 외치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계속 마주해야 하는데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 허술한 거짓에 어이없이 속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

이해는 됐지만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내가 당할 땐 모른 척하더니, 본인이 불안해지니 이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나 보지? 마지막까지 ‘나름 미안함이 있었겠지’ 하며 영서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각자의 불편한 마음을 안고, 우린 어색하게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가 멍했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하지만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영서였다.

[사실 너 퇴사하고 네 생각 많이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그랬을 거 같진 않았거든.]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인가 했다. 난 대답 없이 영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는 차마 얘기 못 했지만. 박이 네가 평소에 자기한테 애들이 너무 답답하다며 팀원들 험담도 많이 했다고도 했거든. 그런 말을 들으니까 '그런가' 싶으면서 마음이 흔들리더라고. 그렇다고 너한테 직접 확인하기도 그렇고.]

이젠 좀 오싹해졌다. '박. 얘 뭐지?'

[얘 많이 이상한데? 나야 나와서 볼 일도 없지만 너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그동안 의심하고 네 편에 못 섰던 거 미안해. 이제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화면을 노려보다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긴 외로움 끝에 남은 건 '미안해' 이 말뿐인가. 한없이 씁쓸해졌다. 그동안 '도대체 뭐가 잘못됐나. 난 뭘 잘못했나'하며 수없이 돌아봤던 지난 시간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내려다 그만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동안 난 왜 그렇게 혼자 날을 세우며 싸웠을까. 결국 내게 남는 건 상처뿐인데. 정작 상처를 준 사람들은 '미안해'란 한 마디로 모든 게 말끔해지는데.


[다음 글에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따돌림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