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 대할 때면 가끔 '어! 뭐지?'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였다. 그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때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매번 의문을 가진 채로 넘어갔다.
그중 하나는 이거였다. 박은 종종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일하면서 뭔가가 불편하면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곤 했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옆자리 박에게 먼저 물었다.
"이거 좀 비효율적이지 않아? 이렇게 하면 훨씬 간단하게 할 수 있는데, 바꿔볼까?"
박은 대체로 시큰둥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 며칠 뒤, 팀원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박은 이렇게 말했다.
"다들 그거 좀 불편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해봤더니 훨씬 간단하게 할 수 있더라. 앞으로는 이렇게 하자."
당황스럽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별로라고 했어도, 막상 해보니 괜찮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회의에서였다. 내가 미리 언급한 내용을 마치 자기 생각처럼 박은 말했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태연한 얼굴로.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이게 단순한 실수나 착각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나는 박에게 물었다.
"그거 아까 내가 말한 거잖아."
"내가 예전부터 생각한 거야."
박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이때도 '얘 좀 이상하네' 하는 찜찜함만 남긴 채 넘어갔다. '따져서 뭐 해. 누구 생각이 뭐 중요해?' 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낸 이 수수께끼 같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젠 풀고 싶어졌다. 도대체 뭔지.
생각만 있던 어느 날,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 A와 친한 동생을 만났다. 동생이 상사와 트러블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A가 말했다.
"크게 문제 될 거 없으면 그냥 상사 말에 따라줘. 상사도 사람인데, 그래야 기분이 좋지."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A는 "네가 맞으면 끝까지 부딪혀"라고 할 스타일이었으니까. 이어지는 말에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감이 낮으면 괜한 데서 자존심을 부려. 한 번 그냥 숙이고 들어가면 될 걸, 그러면 마치 자기 자신이 낮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 말은 며칠 전, 내가 A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A는 내 앞에서 내가 한 얘기를 마치 자기 생각처럼 동생에게 했다. 내 눈치는 전혀 살피지 않았다. 장난인가도 싶었지만 오히려 진지했다. 순간 박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A도 박처럼 때때로 내 말을 자기 말처럼 따라 했다. 둘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뭐가 있길래 이렇게 똑같은 패턴을 보이는 걸까.
해답을 얻고 싶은 마음이 더 가절해졌다. 그때부터 열심히 검색에 들어갔지만 딱 들어맞는 설명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한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올린 사연을 보게 됐다. 남편이 늘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면 자기는 따라한 적이 없다며 발뺌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딱 내 얘기였다. 댓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아는 누구도 그러는데, 진짜 그거 열받아요."
"이런 사람 제 주변에도 있어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구나. 새삼 놀라웠다. 올려진 반응을 죽 읽어 내려가다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트럼프식 화법이죠. 남이 한 말을 자기 말처럼 하는 거요. 나르시시스트가 잘 그래요."
'나르시시스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아는 나르시시스트는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어디 어디 누구야!" 하며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럴 리가. 박은 언제나 조용했고, 절대 나서는 법이 없었는데. 하지만 왠지 이게 해답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파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