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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사유:상사의 폭언

by 김자옥

사직서 양식을 열었다. 이미 채워 넣은 소속, 직위, 성명을 빠르게 확인하고 사직 사유란에서 시선이 멈췄다.

‘사직 사유 : 개인 사정’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 사정 앞으로 커서를 가져가 딜리트 키를 누르곤 다시 글자를 입력했다.

‘상사의 폭언’

그래 이게 맞지. 잠깐 이대로 사직서를 뽑아 팀장에게 던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직서가 든 흰 봉투를 팀장에게 건넨다. 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곤 내용물을 꺼낸다. 그는 “사직서?” 하더니 나를 힐끗 쳐다본다. 짧게 스치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거슬린다. 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 팀장은 사직서를 대충 보고 다시 접으려다 사직 사유란을 발견한다. 팀장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내가 뭘 잘못 봤나?’ 하는 얼굴로 종이에 얼굴을 바짝 가져간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 지금 장난해?”

각오한 일인데도 가슴이 터질 듯 뛴다. 잔뜩 긴장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한다.

“장난 아닌데요. 폭언하셨잖아요. 지금도 하고 계시고요.”

“장난이 아닌데 사직서를 이따위로 써?” 팀장은 얼굴이 벌게져선 소리친다. “뭐, 해보자는 거야?”

난 흔들리지 않고 미리 준비해 간 서류를 팀장 앞에 내민다. 그간 그가 쏟아낸 무례한 말들이 고스란히 담긴 이메일과 카톡 대화. 툭하면 ‘일 안 하고 논다’라던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빽빽한 업무일정표. 팀장은 빠르게 훑어보곤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애써 당당한 척 말한다.

“이게 뭐? 네가 잘했어 봐, 그래도 내가 이랬나.”

찔리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정당화에 열을 올리는 법이다. 난 여전히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대답한다.

“이사님께도 보여드릴 생각이에요.”

당당하던 팀장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나는 그제야 여유를 얻고 무심한 듯 묻는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팀장은 ‘뭐 이런 게 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난 먼저 일어나서 걸어 나가다가 돌아서며 말한다.

“실은 이사님께는 이미 보내 드렸어요. 여기 오기 전에요.”

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자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커서가 깜빡였다. 의미 없는 상상이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할 때마다 후련하고 통쾌했다. 물론 ‘과연 이런 날이 올까, 아니 이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하얗고 뽀얀 찹쌀떡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것처럼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하지만 이번의 상상은 좀 달랐다. 지금까진 그야말로 상상이었다면 이번은 상상보다는 시뮬레이션에 더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여차하면’하는 한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냉정해지자. 사직 사유는 둘째치고 지금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사직서를 내는 게 맞나? 감정이 너무 앞선 건 아닌가? 순간, 그간의 세월이 스쳤다. ‘더 힘든 일도 버텼잖아. 이번에도 잘 넘어갈 수 있어. 회사 생활이 다 그렇지 뭐. 너 이대로 나가면 지는 거야.’ 나는 나 자신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떻게 매번 버티고 이겨. 피하고 질 때도 있는 거지. 너 버틸 만큼 버텼어. 이젠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내 마음? 내 마음대로 하면 그다음엔? 아…, 모르겠다. 일단 그대로 저장하고 파일을 닫았다.


결국, 사직서를 내는 날이 오긴 했다. 다만 언제나 현실은 상상보다 더 구질구질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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