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by 김자옥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메일 알람이 떴다. 전부 회의실로 모이라는 팀장의 공지였다.

‘바빠 죽겠는데.’

팀장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곤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팀장은 일방적인 무리한 지시를 내릴 때면 일부러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럴 때면 옛날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얼핏 꽤 근엄해 보이지만 이내 부족함이 드러나는 왕 내지는 회장님 역할이 생각났다. 혹시라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면 낭패니 실룩거리는 입술을 힘 있게 앙 다물었다.


“앞으로 모든 일의 마감은 기존보다 일주일씩 더 앞당기기로 했어. 요즘 다들 정신도 좀 해이해진 것 같고, 몇몇 실수도 있고 해서 그러기로 했으니까 정신 더 바짝 차리도록. 게으름 피울 생각들 말고.”


‘게으름?’이란 말에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뱃속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번역이 주 업무인 우리 팀 일엔 거래처가 요구한 기한일이 있었다. 회사는 서비스를 운운하며 그보다 2주는 더 빨리 처리하라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려야 피울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지만 팀장은 툭하면 게으름을 논했다. 게다가 최근 실수는 전부 팀장의 불찰이 원인이었다. 팀장은 자기 실수가 있을 때면 엉뚱하게도 직원들을 잡았다.


회의실 공기는 무거웠다. 팀장은 슬쩍 팀원들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이사님 지시야. 지금 업체 간 경쟁도 치열한데 뭐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냐면서 내리신 조치니까 그렇게들 알아.”

팀원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만큼 입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 팀 내 최고 선임 격인 박 선배가 나서주면 좋겠지만 그녀는 여간해서 나서는 법이 없었다. 물론 뒤에서는 누구보다 흥분하며 열을 올리는 그녀였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내가 진짜 한 마디 하려다 참았는데.” 그때마다 의문이었다. ‘왜 참았다는 거지? 참은 게 아니고 못한 거 아니고?’


나는 마음이 타들어 갔다. ‘왜 다들 말이 없어. 이대로 결정되면 어쩌려고.’ 매번 나만 이의를 제기해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아 웬만하면 이젠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팀장님, 일을 빨리 처리해 주는 것도 좋지만” 팀장의 표정이 벌써 좋지 않았다. 순간 멈칫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질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하면 한 번 더 생각할 것도 그냥 넘기게 될 수도 있고요. 저희 지금도…”

“빨리하면서 완벽하게 하는 게 능력이지. 경력이 몇 년인데 그런 말을 해.”

‘그럼 네가 해보든가!’ 하는 말은 꿀꺽 삼켰다.

“저희 지금도 쫓기듯 일하는데 여기서 마감을 더 당기면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쯤 했으면 누구라도 나서서 거들길 바랐건만 하나같이 남의 일인 양 고개만 깊게 떨구고 있었다.

“뭐가 어렵다는 거야. 그냥 하면 되지. 일단 해봐.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늘 이런 식이었다. 마치 해보고 안 되면 그땐 바꿀 수도 있는 것처럼 “일단 해봐.” 하지만 바뀌는 일은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파일 더미가 올려져 있었다. ‘이게 다 몇 개야.’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파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총 다섯 건에 기한도 짧고 마감일마저 비슷비슷했다. 이미 다음 달까지 스케줄이 빽빽하게 잡혀 있는 상태에서 이걸 더 어찌 끼워 넣으라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뭔가 따로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을 이렇게 줄 땐 무슨 생각이 있겠지. 내내 팀장의 부름이나 메일을 기다렸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해진 난 나라도 먼저 물어야지 싶었다. 가서 얘길 할까 하다가 글을 택했다. 불쑥 화라도 내면 하려던 말을 못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증거가 남아야 했다. 나중에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최대한 정중히, 팀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메일을 써 내려갔다. 주신 파일은 확인했다, 마감일이 많이 겹치고 이미 갖고 있는 일들도 있어 아무래도 처리하는 데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다른 업무를 조정하면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조정이 가능한지 여쭙고 싶다, 바쁘신데 죄송하다.

책잡힐 건 없는지, 몇 줄 안 되는 메일을 몇 번씩 읽고 고쳤다. 보내기를 클릭하고 나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다시 얘기해 봐야 하나 아님 죽었다 생각하고 그냥 해야 하나. 생각보다 팀장의 답은 빠르게 왔다. 제대로 읽기나 했나 싶을 정도로.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아랫사람이긴 해도 메일을 이따위로 보낸다고? 와… 좀처럼 충격과 모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고 다시 메일을 작성했다. ‘팀장님, 제가 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첫 번째 메일보다 더 신중을 기했다. 마지막 ‘죄송하다’는 말을 두고 한참 고민했다. 죄송하진 않은데. 몇 번이나 뺐다가 넣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넣었다.

이번에도 빠르게 답장이 왔다.


“그럼 네가 이사님한테 직접 가서 얘기해 보든가.”


너어?! 가슴이 뻐근해졌다. 헤겔은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통해서만 주인일 수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저자세였던 것 같다. 그래도 상사라고 예의를 지켜주니 자기가 진짜 주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 역시 마지막 죄송하다는 말은 빼는 게 옳았다. 순간 오기가 생겼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메일을 보냈다. 생각은 해보고 답하나 싶을 만큼 즉각적으로 대꾸하던 사람이 이번에 감감무소식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메일이 왔다.

“파일 다시 가져와 봐.”

피식 웃음이 났다. 작은 승리감이 밀려들었다. ‘진작 이럴 것이지. 이사님한테 가보라면 내가 쫄 줄 알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씁쓸함이 차올랐다. 결국 나는 그가 선심 쓰듯 내미는 조정안을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헤겔은 결국엔 노예가 주체가 되는 거라 했지만, 그날의 나는 그냥 노예였다. 그의 지시와 허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예든 주인이든 어쨌든 이번 일은 잘 해결됐다 싶었다. 며칠간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직 사유:상사의 폭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