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호출이 있었다. 의아했다. 이사가 날 직접 부를 일이 뭐가 있지.
“일하기 많이 힘든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강 팀장 말이 일을 잘 안 하려고 한다고…,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싶어서 불렀지.”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어떻게 대답할까. 있는 그대로 솔직히? 아니면 앞으로 계속 부딪힐 거 감안해서 적당히 넘어가? 아니다. 그럴 순 없었다. 아닌 걸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사도 팀장의 실체를 알아야 하지 않나. 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네! 일정을 좀 고려해서 일을 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때가 종종 있고, 게다가 조율도 안 된다고 하니 힘든 면이 있습니다.”
이사는 당황한 듯했다. “그래? 그러면 안 되지”라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사는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 팀장 말이… 예의도 좀 없다고.”
‘와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더 이상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소통은 메일로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제가 예의가 없었다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오히려 강 팀장 쪽입니다. 그간 주고받은 메일만 보셔도 금방 아실 것 같습니다. 메일은 지금이라도 확인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난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이사는 적잖이 놀란 듯했다. 이사에게 난 사무실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가끔 오가다 마주치면 목례만 하고 지나치는 여러 직원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별 불만 없이 묵묵히 일하는 존재라 여기던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난 그간 담아둔 말을 마저 다 하기로 했다. 어쩐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예감이란 어쩜 이리 정확한지.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저를 따로 불러서 얘기해 보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에겐 아무 얘기도 없이 게다가 본인은 빠지면서 상부를 직접 통하게 하는 게 팀의 리더가 할 적합한 행동인지 의문이 듭니다. 구성원의 사기를 북돋고 잘 이끌어가는 게 리더가 할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달변가였던가. 나 스스로도 놀라며 기특해하는데 이사는 나보다 몇 배는 더 놀란 듯했다. 하긴 간단히 타이르고 보낼 생각이었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알았겠나. 게다가 어쩌면 이 말은 자신을 향하는 말이기도 할 테니 뜨끔하는 면도 있지 않았을까. 이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강 팀장 얘기는 대강 들어서 알고 있긴 한데 흠…. 나도 강 팀장 불러서 다시 한번 얘기해 볼 테니까, 가서 둘이 잘 얘기해 봐. 그래도 상사잖아?”
‘그래도 상사잖아’라는 말이 묘하게 위안이 되면서도 허탈했다. ‘그래도’란 말은 일단 내 얘기는 긍정한다는 뜻인 동시에 그럼에도 어쨌든 상황은 바뀌지 않으니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뜻이다.
어릴 때 동생과 싸운 후면 엄마는 늘 내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누나잖아.” 언뜻 들으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지만, 결론은 한결같았다. “네가 이해해.” 결국 참으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무력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게다가 가서 잘 얘기해 보라니. 초등학교 때 날 괴롭힌 친구와 나를 함께 불어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때린 건 상대인데 내게 화해의 손을 내밀라고 재촉하는 폭력적인 상황. 이사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 그저 인자하고 너그러운 윗사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여기겠지? 그 옛날 엄마나 선생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사 방을 나와 자리에 앉았다. 생각할수록 실소가 나왔다. 뭐, 예의가 없어? 자기가 할 말이야? 메타인지가 그렇게 안 되나. 하긴 그랬으면 실수는 자기가 하고 직원 탓으로 돌리거나 정신없이 바쁜 직원들을 보며 한가하게 뭐가 바쁘냐고 하는 일은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