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저에게 불만이 있으셨으면 저를 먼저 부르시지요. 이사님에게까지 갈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 나올까 봐 바로 위에 보고한 거야. 이렇게 눈 똑바로 뜨고 대들까 봐."
이 정도의 사람이었나. 난 팀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늙은 어린아이 같았다. 어른이 아닌 아이를 대하듯 살살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최대한 차분히 내 입장과 감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팀장은 나의 노력을 한 방에 무색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번 일만 갖고 얘기한 게 아냐. 네 평소 행실을 갖고 얘기한 거지. 네가 어디 군말 없이 일해? 다들 아무 불만이 없는데 너만 말이 많아. 너만.”
절망감이 들었다. 약간이나마 대화로 풀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팀장님, 회사에서 군말 없이 일해야 하나요? 일하면서 의견 정도는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누가 너 보고 의견 얘기하래?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라고!”
“그럼, 일을 제대로 시키셔야죠. 잘못 지시하시는 것도 많고 놓치시는 일도 자주 있으시잖아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나도 놀랐다. 아무래도 말을 삼키는 데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 팀장은 얼굴이 벌게져선 올라오는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넌 뭐가 그렇게 대단해? 번역이나 하는 주제에. 번역? 그까짓 거 나도 해.”
“제가 하는 일을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니 참 유감이네요. 저는 제 일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데요.”
“너 아니어도 여기 들어오겠다는 사람 많아. 너보다 어린애들도 줄을 섰어.”
하아, 지금껏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해왔단 말인가. 그간 그래도 이해해 보고자 잘 지내보고자 고심해 왔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난 그의 시선에 눈을 맞추기로 했다.
“팀장님 대신할 사람도 많아요.”
“이봐, 이봐. 네가 이렇다니까!” 팀장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잠시 놓은 것 같았다. “넌 네가 잘난 줄 알지? 근데 팀원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알아? 다들 너랑 일하기 힘들대. 알기나 해?”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순간의 표정을 읽었는지 팀장의 얼굴에서 야비한 승리의 미소가 보였다.
“팀원들 얘기는 제가 따로 들어보겠습니다. 그거 말고 저에게 다른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가서 팀원들하고나 얘기해 봐. 다들 뭐라는지.”
“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태연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뭘 한 거지? 무엇보다 팀원들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나랑 일하기 힘들다고 했다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우선 사실 여부를 따져보자. 보통 “누가 그러는데 너 너무 별로래” 같은 말은 ‘누구’의 말보다 말하는 사람 본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기 생각을 직접 전할 용기는 없고 상대에게 상처는 주고 싶은 때 비겁하게 남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누구'는 어쩌면 실제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에 더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고 “그치? 걔 진짜 완전 별로야” 라며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들은 말을 당사자에게 전한다는 건, 그것도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달하는 게 아닌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 식의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은 의도적으로 마음을 흔들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려는 심술굳은 심리다. "다들 너랑 일하기 힘들대"라며 보인 팀장의 미소가 이를 증명한다.
이뿐인가. 팀장의 이 말 한마디로 나는 팀원들은 의심할 것이고 팀장은 팀원들에게 내 얘길 또 어떻게 전할지 모를 일이다. 나와 팀원들 사이는 껄끄러워질 테고, 자신은 그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하면 그만이다.
남들도 다 네가 이상하대, 라고 하면 내가 움츠러들줄 알았겠지. 천만에. 내가 그 얕은 속마음을 모를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까마득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