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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Oct 05. 2020

내가 똑똑히 기억해

한 예능에 개그맨 이경규, 김구라, 방송인 김성주가 나왔다. 김성주는 이경규와 어느 한 프로그램을 같이 했을 때의 에피소드를 전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경규 형님한테 호텔 방에서 맥주 캔으로 두드려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 다른 출연자들이 놀라자, 김구라는 “두드려 맞지 않았어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명량 히어로’ 촬영 당시 베이징에 간 적이 있었어요. 이때 숙소에서 이경규 씨가 김성주 씨한테 조언을 하는데 김성주 씨가 졸았어요. 그래서 이경규 씨가 거기다 캔을 하나 던진 거지 두드려 맞았다는 표현은 좀...”이라고 했다. 이에 김성주는 맥주 캔에 맥주가 들어있었다며 이 정도면 두드려 맞은 거 아니냐고 항변해 다들 크게 웃었다.    

 

‘두드려 맞았다’는 말은 김성주가 일부러 재미를 위해 지어낸 말일까? 나는 어느 정도는 김성주 기억 속에는 두르려 맞은 걸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주가 방송에서 몇 번인가 한 적이 있다. 시간이 꽤 지난 일인 듯한데도 계속 얘기한다는 건 그만큼 뇌리에 크게 박혔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왜곡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서 종종 예전 일을 크게 부풀려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저게 진짠가 싶을 정도로 과장을 한다. 가끔은 어이없게도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한껏 부풀린다. “그때 걔가 나한테 엄청 뭐라 했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당했냐?”는 식이다. 내 기억 속의 얘기와 전혀 다른 얘기다. 내 기억으로는 이야기 속 상대방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어떤 말을 들은 걸로 기억한다. 심지어는 들은 말까지 지어낸다. 처음에는 왜 말을 지어내지, 란 생각이 들지만 자꾸 듣다 보면 그런 말을 했나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내가 똑똑히 기억해.’, ‘내 기억이 분명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기억은 정말 정확할까? 


기억에 관한 유명한 실험 하나가 있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된 지 70여 초 후 폭발했다. 지켜보던 전 세계인이 놀란 아주 큰 사건이다. 미국의 심리학 교수 울리 나이서는 챌린저호 폭발사건 다음날 106명의 학생들에게 이 사건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들었는지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했다. 2년 반 후 학생들을 다시 불러 같은 질문을 했다. 학생들 중 25%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고, 겨우 10%도 안 되는 학생들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더 흥미로운 실험 결과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쓴 2년 반 전 설문지를 보여줘도 그 설문지가 잘못되었고 현재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되거나,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늘 예전 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많이 들어 질릴 정도지만 얘기하는 사람은 마치 처음이라는 듯 흥분하며 이야기한다. 근데 가만 듣다 보면 이야기가 점점 보태진다. 듣는 사람은 알지만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듯하다. 말이 점점 보태지고 과장되지만 그 말은 점점 사실이 되어 간다. 그리고 그에겐 또 하나의 기억이 된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날까? 사실에 대한 기억보다 감정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고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의식이 강할수록 이런 일은 많이 발생한다. 내가 당한 일을 크게 부각시키다 보니 나머지 것들을 왜곡하게 된다. 내 감정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없던 기억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걸 강하게 믿는다.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 일 자체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어 왜곡 따윈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런 기억은 절대 잊을 수도 흐릿해지지도 않는다. 이런 특별한 기억이 아니라면 내 기억은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 생생한 내 기억은 정말 생생한 건지. 혹시 내가 만든 기억은 아닌지. 왜곡한 부분은 없는지. 정확하다고 확신했던 내 기억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 기억은 생각만큼 정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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