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집요하리만치 틀린 것으로 확신하는지 때로는 안타깝기가 도를 넘는다. 오른쪽과 왼쪽은 절대로 섞일 수가 없으며 남성과 여성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경이 거의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21세기에 한반도만큼 동과 서가 어울리지 못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어느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세상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고 하였다. 존재의 가치가 내 생각을 드러나기도 전에 나의 조건으로 이미 판단되기 일쑤인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 났거나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어느 편인 것이고, 나의 성별은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나의 위치를 대개 결정하고 있다. 그런 부조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또 웃기는 것일까.
편을 가르는 잣대에 무서운 게 또 하나 있다. 나이. 어른에게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젊은이에게 노인은 늘 어렵다. 끼워주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나누는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생각을 견주기를 항상 꺼린다. 웬만하면 섞이지 않으려 하고 끼리끼리 서로를 탓하기만 한다. 온갖 사회적 담론도 같은 색깔의 무리들 안에서만 나누고 확인하며 규정하고 성토한다.
그 같은 공론의 장에서 담론은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지 않을까. 벽을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방법이 없다. 폭넓은 아량이 필요하고 속 깊은 배려가 절실하다. 스스로들 세운 벽 속에 갇힌 21세기 한국사회를 구출해야 한다. 이념, 성별, 지역, 나이, 아 그리고 종교. 이들 기준을 모두 동원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좁디좁은 울타리에 갇힐 것인가.
가정의 달 5월에도 가슴 아픈 뉴스로 한가득이다. 마침 어린이날 새벽에 생활고에 시달린 젊은 부부가 두 아이들과 생을 마감하였다. 하필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다리에서 투신하려던 모녀를 설득 끝에 가까스로 구했다는 소식도 있다. 스승의 날과 부부의 날을 눈 앞에 두고도 아슬아슬할 뿐.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대립과 갈등, 반목과 질시를 거듭한 나머지 대화와 타협, 화합과 상생을 정말로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젊은이들의 처지를 듣고 도울 방법이 그렇게 없을까. 힘든 가정들의 상황을 헤아려 세워줄 장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울타리 밖 남들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할 널 푼수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세대공감’ 한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이지만, 세대 간 생각과 해석의 차이를 짚어보고 공감대를 넓혀가려는 의도로 읽힌다. 앞으로 세대뿐 아니라, 지역들 사이에는 다른 느낌들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드러내 보았으면 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혹 남성과 여성 간에는 어떤 다른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종교들 간에 그리고 신학적 해석들 가운데 존재하는 갈등과 마찰은 무엇 때문일까.
다른 흐름과 느낌을 어떻게 조화롭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들 다른 생각과 느낌을 안고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 반목이 무관심을 키우고 무관심은 자칫 혐오를 일으킨다. 혐오와 무관심은 고립과 절망을 초래할 터이다. 극단적인 선택이 뉴스가 되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고심하면서 마음을 모으는 사회. 고립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웃을 소통과 대화로 건져 올리는 공동체. 공감하는 나 하나로부터 시작할 일이 아닌가. 남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은 그만 하여야 한다.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 안의 공감능력을 백배로 끌어올려 이웃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시라. 5월을 다시 눈부신 계절로 만들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