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년 전 엊그제, 약관 34세 독일 청년이 세상을 바꾸었다. 마르틴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은 교회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상의 물줄기를 소용돌이치게 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부당한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신교의 출발을 알렸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의 소신과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하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술회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아침에 95개의 문장으로 적어 교회 정문에 내걸었던 선언문에도 그의 다짐과 경고는 물론 누구와도 토론하겠다는 의지를 함께 담았다. 개신교가 태동했으며, 사회와 역사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가. 웬일인지 교회는 권력과 금력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루터의 개혁은 교회를 ‘돈’의 그림자로부터 떼어내지 않았는가. 당시 면죄부로 상징되는 교황의 금권을 반성경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우리 교회가 권력을 탐하고 돈을 좇는 모습을 언론에서 만날 때, 목사님과 교회를 믿고 따르는 착한 교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된다.
교회는 개인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기복(祈福)의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렵고 힘든 민생을 이어가느라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찾아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부당하고 문화적으로 왜곡된 이슈들에 대하여도 윤리적 도덕적으로 반듯한 목소리를 만들어 전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목격하는 한국교회는 사회적 담론 형성의 권위를 스스로 잃어버렸다. 오늘 들리는 교회의 목소리는 누구보다 앞서 돈과 힘을 따라 세상에서 성공하여 행복하길 바라는 욕망을 전할 뿐이 아닌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정치적으로 건강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교회로부터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오백 년 전 독일 청년이 꿈꾸었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교회로 다시 돌아간 모습이 아닌가. 사람과 이웃을 섬기는 목사가 아니라, 교인들과 주변으로부터 대접받는 목사. 동네의 여느 집들보다 화려하게 우뚝 선 교회 건물들. 힘없는 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힘있는 자들을 따르는 교회. 사회의 건강을 돌보기 보다 개인의 행복에만 천착하는 메시지.
구석구석에서 선한 목회를 펼치는 목사님들도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싱싱한 포부와 멋진 믿음으로 신학에 도전하는 젊은이들도 많을 터이다. 16세기 독일 청년의 용기와 도전을 21세기에도 만나보고 싶다. 저렇듯 무너져 내리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앞에 든든한 믿음으로 무장한 기개와 다짐을 목격하고 싶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두 번째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는 없을까. 이대로는 안 된다. 착한 교인들이 불쌍하고 수렁에 빠진 사회가 심각하다. 마지막 보루 한국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나라에 치유와 회복이 깃드는 날이 어서 찾아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