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브륄레'라는 음식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 음식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생소했던 이름에서 오는 거리감과는 다르게 단 한 번 맛본 이후로 어딜 가든 '크렘브륄레' 다섯 자가 메뉴판에 적혀있을 때면 어김없이 테이블에는 아메리카노와 함께 이 메뉴가 올라와있었다. 짧은 경험으로는 유추하기 쉽지 않았던 처음 본 모양새는 말 그대로 '겉바속촉'이었다.
이름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듯이 영어권 국가의 음식은 아니었다. 유럽 여행 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프랑스가 이번에는 나의 혀를 사로잡았다. 정확한 레시피는 알 수 없지만 크림 위에 단단한 캐러멜을 깨서 티 스푼으로 떠먹는 형식의 디저트, 그게 '크렘브륄레'의 정체다.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이 음식은 프랜차이즈 카페 케이크 따위만 알던 내게 충격을 안겨줬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좋은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고 미소 띤 걸음 한 발, 한 발 옮기다 보면 웃음 짓게 만드는 곳이 눈앞에 있다. 그런 곳을 다들 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운이 좋게도 내게는 그런 곳이 많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발견한 카페인 이곳 1404호가 추가되었다. '1404호'는 사실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이름이었다. 내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사실 낯선 이름의 디저트를 만드는 곳과는 상반되게 너무나도 친숙한 가게 이름이 한 몫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 될 무렵 부모님의 경제적 상황은 많이 악화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이사 갈건대 집구경 갈래?' 말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지은 지 이제 1년 됐다는 새로운 아파트로 향했다. 가볍던 발걸음을 빼앗으려는 듯이 새로 이사 갈 아파트는 현관의 크기부터 반으로 줄어있었다. 현관과 내부를 구분 짓는 중문도 없이, 현관문 몇 걸음 앞에 화장실 문이 보였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들어가기를 한사코 거부하다 울먹이기까지 하는 철없는 나를 보던 부모님의 눈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고 첫인상이 달갑지 않았던 그곳은 예정된 것처럼 새로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1404호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바뀐 것은 우리 가족의 서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방학이면 뒹굴뒹굴 높다란 책장에서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제목의 책을 꺼내 들어 재미가 붙을 때까지 씨름을 하다가 지루해지면 인라인을 신고 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나랑 놀아주던 서재. 형이 학교와 학원을 다녀온 후 부모님 몰래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게 PC방의 역할을 해주던 서재, 아버지가 가벼운 문서작성을 하거나 업무를 볼 때 오피스의 역할을 해주던 서재. 사라진 서재처럼 거실도 부엌도 각각의 방도 화장실도 모두 좁아졌고, 그만큼 우리 가족은 좁은 집에 적응해야 했다.
새로운 내 방은 책상을 넣고 나면 퀸사이즈 침대는 공간이 부족해서 굉장히 비좁았다. 형 방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책상 옆 바닥에 두툼한 토퍼를 깔고 자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다시 개어놓아야 발 디딜곳이 생겼다. 형 방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어서 그곳에 책장을 3개나 넣고 옷장을 1개를 넣고 행거를 1개 집어넣었다. 가득 채운 베란다는 창고 같았다. 넓은 방에서 지내던 내게 이 모든 것은 낯설었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사를 했었고 길었던 겨울방학이 지나 나는 초등학교 마지막 1년을 남겨둔 6학년이 되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그랬을까 1404호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 한 동네에서 옆 아파트로의 이사였기 집에 들어와 베란다를 바라보면 이전에 살던 아파트가 한눈에 보였다. 다니던 학원과 학교와 집을 오가며 타던 버스, 그리고 내가 놀던 동네, 공원, 놀이터, 자주 가던 서점, 그리고 학원가는 길 행복을 안겨주었던 천냥 피자까지 모든 것들은 그대로였다. 변한 건 공간의 기쁨을 알아가기 시작하던 시기, 44평에서 28평으로 줄어든 집 크기만큼 자랑하기 좋아하던 나의 허영과 자신감도 줄어들었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1년은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다. 106호에서 1404호로의 이동은 나의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예고편인 것 같았다. 어느 중학교를 갈 것이냐부터 시작된 걱정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들은 이제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모님과 주변 어른의 압박이 되어 나를 점점 몰아세웠다. 하루 일과 중 내가 머무는 어느 한 공간도 편한 곳은 없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긴장과 부담을 안고 매일매일을 보내야 한다는 그런 현실이 아직 세상을 모르는 13살 철부지 어린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뒹굴고 땀 흘리기를 좋아했던 나의 취미가 갑자기 바뀌기 시작한 것도 1404호로 이사 간 무렵부터였다. 날랜 몸집을 가졌던 내가 조금씩 통통해지기 시작하고 집에 들어가면 컴퓨터 앞에 앉아 RPG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내내 가지도 않던 PC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거기는 나를 몰아세우는 어느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넓은 세상이 있었고 멋진 아이템을 가진 내가 있었다. 쉽게 올라가는 레벨만큼 쉽게 인정받는 게임 속에서 나는 차가운 계절과 함께 나에게 사춘기라는 차가운 계단을 잊게 해 주었다. 현실에서 벗어나 내가 만든 캐릭터가 멋지게 미션을 완수해 나가면서 성장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행복해졌다. 부모님과 학교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들의 그림자 속으로 나만의 조용한 일탈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