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지 않는 달 / 이지은
이 소설은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 없이 꽉 채워진 밀도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달과 늑대가 주인공이지만 이는 곧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레 읽다 보면 눈으로 글이 들어와 머리에 장면이 그려지고 마음으로 반응한다.
카나(늑대)의 모성애, 달의 반전, 그리고 문장들. 처음에는 멈칫하다가 결국엔 다 이해가 되는 소설이다.
작가는 모든 문장들을 독자의 마음에 생생하게 그려지도록, 늑대와 달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도록 잘 표현해 놓았다. 특히 문장 중간중간에 쓰인 의성어가 마치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어 장면을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150p의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어떤 방식으로 후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줄거리만을 이야기하면 알맹이 없는 글만 늘어놓을 것 같고 나의 역량으로는 이 저릿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거니와 훗날 후기를 읽었을 때 이 순간의 감정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줄거리가 되는 주요 문장을 필사해 보기로 했다. 이 소설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장면으로 연결될 때 느끼는 마음의 동요는 예전의 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발췌⁜
◸이 이야기는 오래전 하늘에서 달이 사라졌던 몇 해 간의 이야기이다.
동그랗고 뽀얀 달은 하루도 빠짐없이 인자한 미소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쯤 감은 눈 아래도 드러난 눈물 자국은 달을 더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사람들은 달이 자신들을 보살핀다고 생각했다. 부모처럼 미소 짓고, 눈물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은 눈을 움직이지 못할 뿐이고 입꼬리를 내리지 못할 뿐이었다. 그리고 달은 울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심지어 달에게 기도를 들어줄 신비한 힘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인간의 한심함이 달을 화나게 했다. 달은 표정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인간을 무섭게 노려보고 싶었고 손이라도 있으면 귀를 떼어 버리고 싶었다.
울 수 있다면 매일 울고 싶었다.
달은 인간들이 미웠다.
그렇다고 달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찾아 기쁨의 순간을 만들려고도 했다. 하지만 순수했던 기도들도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욕심의 기도로 변해 갔다. 결국 달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친절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나운 기도들이 하늘을 덮쳤다. 분노와 절망과 공포의 기도들로 하늘이 터져 나갔다.
전쟁이었다.
달은 바랐다. 먼지보다도 작게 부서져 한 톨의 자신도 남지 않기를.◿
거대한 힘에 의해 땅으로 떨어진 달, 몸을 구르며 걸음과 동작을 익혀나갔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전쟁은 끔찍했다. 전쟁에서 가장 약자는 아이들과 여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여인은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달리고 있고 품에 안긴 인간 아이는 매달릴 힘도 없이 늘어졌다.
여인은 오직 하나만 생각하며 뛰었다. 한 살이 채 안 된 아이였다.
"달님... 내 아이를 보살피소서..."
고였던 눈물이 넘쳐흘렀다. 여인은 영원히 잠에 빠졌다.
한참이 지나고 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에 아이가 깼다. 엄마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차가워진 엄마의 볼이 닿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나무를 타고 하늘로 퍼졌다.
하늘에서 떨어지기 직전 달이 들었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달은 모른 척했다. 인간의 소리라면 지긋지긋했다.
달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달아났다.
하지만 뒤도 보지 않고 산 하나를 넘었는데도 울음소리는 귀에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은 길을 되돌아갔다. 아이가 여인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고 있었다.
밤바람에 아이가 몸을 떨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힘을 잃어 갔다.
달이 아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 바람을 막아 줬다.
"원래 삶은 완벽하지 않단다."
처음이었다. 달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그 순간 달의 배 속에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양쪽 옆구리가 간질거리더니 길쭉하고 끝이 둥근 막대가 뽑혀 나왔다. 막대 끝이 다섯 개의 가지로 나누어지고, 크고 작은 마디들이 생겼다. 원래부터 몸에 있던 것같이 관절들은 섬세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손과 팔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달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인간의 일에 달이 개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달은 몸을 돌려 아이에게서 멀어졌다.
달은 숲을 걸으며 산을 빼곡하게 채운 생명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갑자기 달 앞으로 새끼 사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새끼 사슴은 천천히 다가와 달의 냄새를 맡았다.
"인간의 냄새잖아!" 어미 사슴이었다. 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냄새가 어쨌다는 것인가.
어미 사슴은 새끼 사슴과 함께 깊은 숲으로 달아났다.
"멧돼지 때문이야."
달이 몸을 기울여 위를 올려다봤다. 올빼미였다.
"멧돼지들, 인간의 피에 굶주려 있거든. 어린 인간이면 더 끔찍이 사냥할 거야. 인간들 때문에 멧돼지의 땅이 완전히 사라질 뻔했어. 그 후로 멧돼지들은 인간 사냥을 해. 숲의 동물에게 인간 냄새가 배면 그 무리도 가만두지 않아."
"마주치면 물로 뛰어들어. 이곳의 멧돼지들은 물을 무서워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야."
"성가시군."
아이가 있던 숲을 향해 몸을 굴렸다.
그때, 여인이 기댄 바위틈에 쌓여 있는 마른 나뭇잎 더미가 들썩였다. 나뭇잎을 치우고 나니 아래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달은 안심했다.◿
달은 조그만 생명의 울음소리와 그 생명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걸 배우며 위로와 공감을 배웠다.
◸어느 날 카나(늑대)는 자신이 새끼를 밴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나이였기에 모두 놀라워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날도 짝은 빈손이었다. 커다란 고기를 먹지 못한 지 열흘이 넘어갔다. 카나와 짝은 애가 탔다.
함께 토끼 사냥을 나갔다. 너무 오래 굶은 탓인지 계속 놓치고 말았다. 카나의 짝이 너무 멀리까지 토끼를 쫓았다. 카나와 배 속의 새끼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 넘지 말아야 할 땅을 밟아 버렸다. 멧돼지의 땅이었다.
젊고 덩치 큰 멧돼지는 카나의 뒷다리를 물었다. 카나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짝이 멧돼지의 등에 올라타 목을 물어뜯었다. 들판 끝에서 서너 마리의 멧돼지가 무리를 이뤄 달려오고 있었다. 짝이 카나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카나가 지켜야 할 건 자신이 아니라고 전하고 있었다. 카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곤 늑대의 땅으로 달렸다. 카나는 몇 날 며칠 멧돼지의 땅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
무리의 다른 늑대들은 카나를 쫓고 있을 멧돼지들이 늑대의 땅을 침략할까 두려웠다. 새끼를 밴 채 다리를 절뚝이는 늙은 늑대는 무리에 큰 약점이 될 것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진통이 시작되었다. 비좁은 구렁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배에 힘을 줬다. 카나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드디어 새끼가 몸 밖으로 밀려 나왔다. 한 마리였다.
한동안 카나는 굴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늑대의 땅에 어둠이 깔리자 카나가 굴 밖으로 새끼를 물고 나왔다. 얼마 전 새끼를 낳은 다른 암컷 늑대의 굴에 새끼를 밀어 넣었다. 오래전부터 이날을 생각해 왔다.
새끼와 늑대무리를 위해 카나가 해야 할 일이었다. 카나는 떠나야 했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바람이 부는 곳으로 달렸다. 자신의 냄새가 땅에도 하늘에도 새겨지지 않기를.
카나의 불은 젖이 아파 왔다.◿
◸부스럭..
숲 저편에 샛노란 두 개의 빛이 달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회색 늑대였다.
갈비뼈가 선명히 드러난 몸통 아래로 둥그렇게 불어 있는 젖이 보였다. 늑대는 달 너머 덜덜 떨고 있는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미는 죽었나?"
달이 몸을 기울여 늑대를 막아섰다.
늑대는 달을 지나쳐 아이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아이를 품 안으로 넣었다.
"카나. 난 카나."
뒷다리에 난 찢긴 상처가 보였다. 인간 아이에게 가슴을 풀어놓은 늑대와 기어이 살아 내겠다며 짐승의 품을 파고드는 인간 아이.
달은 땅에서 솟아난 돌덩이처럼 붙박여 선 채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
짐승과 인간이 언제까지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 끝을 보고 싶었다.
달은 처음으로 존재의 이유 같은 것이 생겼다.◿
달은 카나와 아이의 먹이를 구할 이는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산을 타고 비탈길을 허우적거리며 이리저리 굴러 떨어졌다.
하늘에서 인간들의 두려움과 존경을 샀던 달이 지금 이 순간은 전혀 쓸모없다는 좌절감을 느꼈다.
◸작은 뱀이 달의 코 옆으로 지나갔다. 뱀을 낚아챘다. 달이 해낸 첫 사냥이었다. 달의 손에서 생명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힘에 휩싸였다.
달은 파충류와 곤충이 더 있을 법한 축축한 이끼 틈으로 들어가 돌처럼 꼼짝 않고 그들을 기다렸다.
사냥감들이 알아서 달의 몸으로 기어와 붙었고 달은 낚아채기만 하면 되었다.
달은 기다란 나뭇가지에 귀뚜라미, 메뚜기, 두꺼비, 개구리 등을 꽂았다. 달이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첫 만찬이면서 스스로 해낸 성공이었다.◿
◸신나게 구르던 달이 멈춰 섰다. 멧돼지 무리의 정찰대였다. 달이 숲에 뿌린 아이의 냄새를 쫓아온 것이었다.
달은 반대편 길로 몸을 굴렸다. 쿵쿵, 땅을 울려 대는 소리가 달의 뒤통수까지 따라붙었다.
"꾸에에엑"
카나가 멧돼지의 등에 올라타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나는 발톱을 세워 멧돼지의 등가죽을 비틀어 쥐었다.
"아이에게 가."
카나가 다급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멧돼지에게 달려들었다. 두 짐승이 뒤엉켜 각자 다른 비명을 뿜어댔다.
카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다리를 적셨다. 달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 아이를 지키려고 목숨을 거는 카나가 점점 궁금해졌다.
"우리를 쫓아올 거야."
"동쪽으로." 달이 말했다.
"하늘에서 보던 호수, 그 안에 큰 섬이 있어. 그곳이 안전해."
카나에겐 회복할 시간이, 아이에겐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그곳으로 가야 했다.◿
◸달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섬이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식물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섬에 도착한 카나는 자신의 상처는 내버려 두고 온종일 아이를 돌봤다.
달이 카나 앞에 먹이 꼬치를 내려놨다. 큰 파충류들이 꼬치에 끼워져 있었다.
"너의 용기로."
카나가 늑대의 인사를 전했다. 늑대들은 배려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이 인사는 '너의 배려를 잊지 않겠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앙상하게 드러나던 카나의 갈비뼈에 살과 근육이 붙고 듬성듬성 빠져 있던 털도 조금씩 자라났다.
카나는 아이에게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카나는 어떤 경우에는 아이가 떼를 쓰거나 애원을 해도 절대로 돕지 않았다. 카나의 그런 태도 때문에 사냥 연습이 끝나면 아이의 몸에는 항상 새로운 상처들이 생겼다.
아이는 자신만의 사냥을 시작했다. 내내 빈손인 것 같았지만 아이는 분명히 뭔가를 얻고 있었다.
달은 연구실을 만들었다. 섬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과 광물을 채집해 세심하게 분류했다. 땅의 세계는 곳곳이 완전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았고, 완벽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게 치밀하게 엮여 있었다. 달은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별자리나 별의 움직임을 통해 땅의 이치를 알아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달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때 별이 가득 담긴 아이의 눈이 보였다.◿
달은 자신이 연구하며 배운 많은 것들을 아이에게 가르쳐주었다.
◸몇 계절이 지났다. 아이는 꽤 많은 걸 혼자 해내려고 했고 결국 혼자 해냈다.
카나가 달의 연구실까지 찾아왔다. 천천히 연구실을 돌며 채집품들의 냄새를 맡았다.
"고기만으로는 부족해."
달은 카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백질만으로 인간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달은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실험을 해야 했다.
달은 통증이 생기는 것과 생기지 않는 것을 분류했다. 통증이 생기지 않는 것들을 모아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두고 보름 정도 지켜봤다. 동물이 먹고 나서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그것의 즙을 짜 아이의 몸에 발랐다. 그러고 나서도 괜찮으면 조금씩 아이에게 먹였다. 다행히 달의 방법은 아이에게 통했다.
달은 아이의 먹거리를 연구할 땐 늘 자신만의 굴로 혼자 들어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달이 한참씩 사라졌다 나타나면 아이를 위한 음식이 동굴에 쌓였다.
"도와줄까?"
달이 대답 없이 카나를 빤히 바라봤다. 카나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가슴속에 뾰족하게 서 있던 뭔가가 톡, 하고 꺾였다. 달은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달은 도움을 받는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간들은 언제나 달을 향해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돕겠다고 나서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루의 반은 이름 모를 식물들을 몸에 쑤셔 넣고 몸부림을 쳤다. 당연히 혼자 이겨 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달은 카나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말이 낯설었다. 깊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자신이 연구실을 오가며 쉽게 굴러다닐 수 있었던 것은 비탈길의 돌멩이들을 치워준 카나의 수고였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달은 그동안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은 두 눈을 감고 아이의 웃음소리, 카나가 조용히 물을 마시는 소리, 작은 발로 물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달이 눈을 떴다. 호수는 해를 비치는 거울 같았다. 카나도 아이도 달도 은빛으로 반짝였다.
달은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일까 궁금했다. 달에게 감정이란 늙지 않는 쥐의 나이를 알아내는 것만큼 어려운 숙제였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무지개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순간이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확신했다.◿
◸투둑-
이상했다.
카나는 달 밑에 떨어진 돌덩어리를 보며 머리를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코로 슬쩍 밀어 보기도 하고 발로 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 달의 눈이 달린 돌이었다. 모양은 남았지만 생기는 없어진 눈.
쩌적-!
달의 표면 여기저기에 잔금들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다. 달은 모두가 잠이 들고 나면 혼자 이곳으로 왔다. 진흙에 송진을 섞어 꾸덕한 덩어리를 만든 다음 손가락 끝에 메추리알만큼 떠 올려 금이 간 곳에 여러 겹으로 발랐다.
달은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달로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땅을 밟고 있지만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카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동굴 안에 굴러다니는 정체 모를 돌덩이들이 달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야?"
"난 괜찮아."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이 긁고 있던 곳이 툭, 하고 카나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카나가 달에게서 떨어진 조각의 냄새를 맡았다.
"나도 그게 궁금해...."
"다 부서지고 작아지면 별이 되나 보지."
카나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고마워."
"누구나 늙어."◿
◸"아이가 뜨거워지고 있어."
오후를 넘어서면서 아이의 몸에는 불그스레한 반점들이 올라왔다.
"인간의 약을 먹여야 해.."
"필요한 것들을 챙겨."
섬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카나가 동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섰다. 달도 굴을 나섰다. 동굴이 조용히 배웅을 했다.
카나가 먼저 호수로 걸어 들어가고 달이 그 뒤를 따랐다. 카나는 물뱀처럼 움직여 아이가 최대한 물에 가라앉지 않게 했다.
"곧 구름이 걷힐 거야."
날씨가 개면 아이의 체취가 수증기를 타고 멀리 퍼질 것이었다.
땅에 도착했을 땐 먹구름이 물러나는 하늘에서 기다랗게 뻗은 무지개가 섬까지 닿아 있었다. 바라지 않은 날씨였다. 태양이 땅의 냄새가 섞인 물들을 빨아들여 숲의 저편으로 날려 보냈다. 아이의 냄새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초대장은 보내졌다. 절대로 오면 안 되는 이들에게.◿
◸한참 안 보이던 멧돼지 무리가 호수 건너편에 나타났다.
달과 카나는 멧돼지가 아이를 보고 물을 건널 용기를 가지게 될까 두려웠다.
숲에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멧돼지들은 드디어 찾아낸 카나 일행들 앞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진득한 침이 턱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카나가 네 발을 넓게 벌리고 발톱을 세워 땅에 박았다. 마치 달과 아이를 지키는 문이 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쿠앙!
검은 멧돼지가 달을 반으로 갈랐다. 떨어져 나간 달은 잘린 과일처럼 옆에 뒤집혀 있었다. 생기를 잃은 그것은 이미 달이 아니었다.
'웃기지 않아? 나 진짜로 반달이 되었어.'
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도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여기를 지켜"
카나가 아이를 밀어 달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아이는 달의 반쪽뿐인 머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매달렸다. 카나가 줄을 물어 달과 아이를 묶는 걸 도왔다.
"너의 용기로." 카나가 인사했다.
달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돌려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아이는 멀어지는 카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우두머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입술이 귀까지 걸려 올라가 있었다. 우두머리는 아이가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늙고 절뚝거리는 늑대 따위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고 느긋하게 아이 사냥을 즐길 생각이라는 걸 카나는 알고 있었다.
카나의 가슴이 황소처럼 부풀어 올랐다. 심장에서 뿜어낸 피가 정수리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카나의 등 털은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두렵지 않다는 몸의 신호였다.
우두머리가 카나의 옆구리를 송곳니로 쳐올렸다. 카나의 몸이 활처럼 휘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카나의 옆구리 털이 시뻘건 피로 젖어 들어 갔다.
우두머리가 목구멍을 거칠게 긁는 숨소리를 내며 카나를 향해 걸어왔다. 우두머리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계속 이빨을 드러내는 카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상처 난 카나의 뒷다리를 짓이겼다.
카나의 비명 소리가 하늘로 퍼졌다.
바닥에 널브러져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두머리는 누렇고 단단하게 박힌 이빨들이 고기를 잘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퍽!
카나가 윗몸을 들어 올려 다리를 틀었다. 뒷발로 주변에 쌓인 흙더미를 차올렸다. 작고 날카로운 나무 조각들과 흙덩이들이 우두머리의 눈, 코, 입, 목구멍으로 박혔다. 우두머리가 뒷걸음질 쳤다.
카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앞다리에 힘을 실어 윗몸을 일으켰다. 우두머리의 목에 이빨을 깊게 꽂혔다.
"꿱!"
우두머리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카나의 입 사이로 붉은색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두머리가 카나를 목에 매달고 나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터엉!
카나를 나무에 박았다. 우두머리는 멈추지 않고 카나를 바위에 짓이겼다. 카나는 우두머리의 목에 딱 붙어있었다.
우두머리는 시뻘건 눈알이 뒤집히고 흰자위가 올라왔다.
"끄르륵 끄에엑..."
통나무 같은 멧돼지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코로 겨우 새어 나오던 숨소리도 끊어졌다.
카나의 은빛 털이 붉은색이 되었다. 발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어디로 가려는지 자꾸만 몸을 일으키는 카나를 바람이 살살 눕혔다. 털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지친 몸을 쓰다듬었다.
"프후."
카나는 옆으로 길게 누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봤다.
카나의 눈이 목성 같았다.
가늘게 뜬 카나의 눈이 짧게 빛났다.◿
◸카나를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우두머리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꾸만 달을 미끄러지게 했다. 달이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달이 지금 해야 하는 건 이 벼랑길을 걸어 내는 것뿐이다.
달이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땅이 저 길 끝에 있다.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볼 색이 가라앉고 몸에 피었던 붉은 반점도 조금 옅어졌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평평한 바위로 걸어갔다. 자신을 찾으러 올 카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저 아이를 인간의 땅으로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지도 못한 기도에 웃음이 나왔지만 입이 없는 달은 웃지 못했다.
투둑-
손가락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부스러지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달은 마음이 급해졌다.
풀숲 사이로 붉은 가시 같은 털이 삐죽하게 튀어나왔다. 우두머리였다. 제대로 들어마셔지지 않는 숨, 완전히 감긴 한쪽 눈, 다른 한쪽으로는 뜨고 있지만 옆으로 돌아간 새빨간 눈알, 목덜미의 축 늘어진 가죽. 카나의 마지막 인사말이었다.
아이가 달을 지키려는 듯 앞으로 섰다.
달은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려 나무 위에 올렸다. 손가락 하나가 더 부러졌다.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뭔가를 알아 버렸다. 아이의 눈에 커다란 눈물이 담겼다. 눈물, 달이 알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달은 멧돼지의 맞은편에 섰다. 달은 땅에 몸을 비벼 자신의 아랫부분을 더 평평히 부수어 냈다. 한결 편하게 설 수 있게 된 대신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우두머리가 달려 나갔다. 목덜미의 살점이 거세게 흔들렸다.
쾅!
폭포 아래로 달이 떨어졌다.
폭포 중간에 솟아 나온 첫 번째 바위에 몸의 반이 깨졌다. 두 번째 바위에 나머지 반이 떨어져 나갔다. 거센 물줄기가 남은 돌덩이를 이리저리 밀쳤다. 세 번째 바위가 부딪히자 눈이 달린 작은 돌덩이만 남았다.
눈 하나 달린 작은달이 노랗게 빛났다. 그때 달의 눈앞에 카나와 아이가 또렷이 보였다. 눈언저리에서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폭포의 주먹질에 눈이 툭 떨어져 나갔다. 완전히 깜깜해졌다.
우두머리는 비명을 질렀다. 우두머리의 눈에 뭔가가 박혔다. 카나가 만든 뼈 칼이었다.
거센 물살이 우두머리를 옭아매 폭포 아래로 던졌다.◿
◸달은 땅으로 떨어졌던 그날처럼 하늘로 떨어졌다.
축복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달은 땅의 기억을 모두 잊었다.
달은 바라는 대로 되었다. 인자한 얼굴도, 기도를 듣던 귀도, 눈물 자국도 사라졌다.
달은 그냥 달이 되었다.◿
◸아이는 달과 멧돼지가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며 나무를 세게 부둥켜안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아이가 손을 풀고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큰 숨을 들이마시고 배에 힘을 단단히 줬다.
"아우, 아---우 아우!"
자그마한 아이의 하울링은 폭포 소리에 묻혀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숲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었다. 커다랗고 환하게 빛나는 동그란 달이 마치 땅에 닿을 것처럼 떠 있었다.
아이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이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앉아 달을 바라봤다.
아이의 눈에 계곡물에서 동동 떠 몸을 흔들고 있는 동그란 달이 보였다. 언제 내려온 걸까. 물 위에서 흘러갈 준비를 하는 달을 보고 아이가 기분 좋게 그르릉거렸다. 아이는 계속 달 꽁무니를 쫓았다.
풍덩!
달이 커다란 계곡물 연못에 빠졌다.
노란 달이 연못에 꽉 찼다.
풍덩!
아이가 달의 품으로 떨어졌다.
달은 조각조각 깨져 커다란 못의 끝까지 퍼져 나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 둥그렇게 빚어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놀이가 끝났다.
아이는 오래전 그날 밤처럼 다시 혼자가 됐다.
연못 건너편 나무 사이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머리가 희끗한 여인과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등불과 길다란 곡괭이를 들고 나왔다.
"여보, 아이예요. 아이!"
더부룩한 머리에 다 젖은 토끼 가죽을 뒤집어쓴 까무잡잡한 아이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이지만 늘 물속에 비치던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아이는 알아보았다.
부인이 아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냄새를 맡고 부인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달의 손과 비슷했지만 달과 달리 따뜻하고 말랑했다.
여인이 손을 뻗어 아이의 통통한 볼에 가져다 댔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몸을 돌려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여인은 아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 누군가 널 지켜 냈으니 여기 있겠지..."
여인이 달을 올려다봤다.
"달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준 것 같구나."
여인은 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겠다고 달에게 맹세했다.
"달님, 감사합니다."
카나도 달도 아이도 없는 그 호수에 보름달이 담겼다.◿
작가의 말
손톱만 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세 개의 짧은 막대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웃는 달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아래 이렇게 썼습니다.
"달은 늘 기도를 받는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벅차고 기뻤으며, 결국은 깊이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 곁으로 와 그 여정에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만으로도, 저는 한없이 행복했습니다. -이지은-
공포감이 닥쳐올 때 자식을 먼저, 나의 목숨보다 타인의 목숨을 먼저 구해야한다는 희생 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하고 있다.
내가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역량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둥그런 달이 카나에게 배우며 늙어갔듯 우리도 서로에게 배우며 깨우치고 늙어가며 죽음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 이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무심했던 달은 카나를 통해 희생과 배려,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다. 한바탕 꿈을 꾼 듯 달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구르며 깨우쳤던 소중한 것들이 몸 여기저기 박혀 있을 것이다.
*메인 이미지 : 책표지 / 그 외 이미지 : 소설 속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