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별생각
저는 시아버지와 같이 살아요. 시아버지는 91세예요. 손을 심하게 떨고, 걷는 게 불편하신 것 외에는 아직 총명하시고 저보다 계산도 빠르시지요. 살아온 세월 만큼 고생도 많이 하셨고 온갖 걱정들로 가득해서 부정적인 성격에 가까우시지요. 아버님의 친구분들은 다 저승에 가셔서 연락하는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고 계시답니다.
세상에 떠도는 장수비결에 맞춰볼 때 하나라도 맞는 게 없는 분이세요. 그래서 가끔 저는 인간의 수명은 하늘의 뜻이라는 걸 믿는 사람이에요. 아버님의 하루일과는 TV에서 보여주는 바둑과 장기를 보며 훈수 두는 일입니다. 목소리도 아주 정정하시지요. 지금과 다를 바 없고 별일 없다면 백수를 거뜬히 누리실 것 같아요.
예전에 시누이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요. 아버님은 젊은 시절부터 저러셨다고요. 바로 그거였어요. 아버님이 젊었을 때부터 이미 이런 루틴을 만들어가고 계신 것이었지요. 어머님의 규칙적인 식사시간과 맞물려 아버님의 일상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던 거예요. 중간중간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으셨겠지만 마음의 울분은 어머님에게 푸셨을 테고 그 울화통을 어머님이 대신 감당하셨겠지요. 그런 어머님은 치매와 뼈수술로 오래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시어머니 수발을 정성껏 하셨으니 그것만 봐도 여타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아버님은 대단한 분이랍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 행동학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지 않으시지만 몇십 년 이상의 루틴이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면 그것도 장수 비결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요.
아무튼 전 며느리로서 7시, 12시, 오후 5시, 이 시간은 아버님의 끼니를 절대 엄수하지요. 몇 분 정도의 오차는 있지만 아버님과 같이 산 이후로 거의 어김없이 실천해오고 있어요.
그리고 절대 아버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아요. 아버님의 행동은 옛날사람 그 자체여서 제가 보기엔 정말 타당하지 않을 때가 많답니다. 하지만 전 가타부타 일절, 한숨 한번 쉬지 않고 침묵을 지켰어요.
처음엔 서로 온통 불편함 뿐이었지만 이제는 불편함과 편함 어느 중간 지점에서 잘 지내는 말없는 사이지요. 아버님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따지고 들었다면 아마 더 불편했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꾸려들 때 이미 힘들어지거든요. 모든 관계가 그렇더라고요.
누구나 고민이 있을 거예요. 자신에 대한 고민, 가족에 대한 고민, 직장에 대한 고민, 친구와의 고민.
그 여러 가지 고민들을 어떻게 풀고 계신가요?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수도 있고,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저의 고민은 분명히 해결돼야 하는 건데 해결돼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꽉 막혀서 해결되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가슴에 콕 박혀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람에 대한 고민일 때는 그 사람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막상 대회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만족은 그때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냥 시간에 맡기고 기다리면 되는 걸까요? 상대방이 바뀌어야 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면 또다시 붙들고 상기시켜야 되고 그런 반복이 저를 지치게 합니다. 그런 반복으로 인해 변화되기보다 서로 체념하게 될까 봐, 그냥 저러다 그만두겠지 그럴까 봐, 자신을 또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둘까 봐, 옆에 가족이 있는데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까 봐, 그게 두렵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지요?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대화로 풀기도 전에 화부터 나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서로 더 이상 기대가치가 없어질까 봐 무섭네요.
그런데 만약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할까요? 시간아 얼른 흘러라 그러면서요.
도대체 나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내 잘못이라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다시 바로잡고 싶어 집니다. 정말 만약 그런 행운의 순간이 온다면 처음부터 나라는 인간을 개조하고 싶어요.
삶의 흐름은 갑자기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수로 인해 서서히 변질되어 가니까요. 서서히 변하기 전에 바로 세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더 빨리 나이를 먹고 싶네요. 이 고민이 다 지나가서 더 이상 고민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저 내 생각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다들 알아서 잘들 살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그때까지도 이 고민으로 살고 있다면 제 명에 못 살지도 모르겠네요. 앗차, 아버님이 계신데 이런 말은 삼가야겠네요.
제 고민을 일일이 늘어놓자니 글을 다 쓰고 난 후 제가 너무 못나 보일까 봐 망설여집니다. 그만두렵니다.
몸이 편하면 휴식이고 마음이 편하면 행복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마음이 편한 상태가 일생 동안 얼마나 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그리고 타고난 성격 탓도 있고요. 낙천적인 사람도 있고 늘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전 낙천적이면서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이에요. 전 뭐든 어중간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호불호가 명확한 성격이 좋은데 전 그렇게 타고나지는 않았어요. 어떤 대상을 두고 선택할 일이 생기면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은, 그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격이죠..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기란,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없는 이상 갈등은 누구나 겪지요.
그 갈등의 순간에 운 좋은 사람과 불운한 사람은 나중에야 알 수 있으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운이 좋고 나쁨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사람마다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듯이 그에 따르는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도 다르겠지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 그 고통이 누가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고 큰일 일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차근차근 해결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또 해결되는 것도 있고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도 있지요.
힘든 순간에 어릴 때 부모님 곁에서 공부했던 시절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더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 무언가 몰입해서 고민했던 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힘들다고 했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듯이 지금 힘든 것은 미래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내 운명이 어디로 갈지 모르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해답이고 진리이겠지요? 요즘 읽는 책에서 그러더라고요. 자신을 현재 테니스코트장으로 끌고 와라, 자기 자리에서 공을 칠 준비를 하라고요. 남의 공에 대해서 논하지 말고 바로 내 공을 똑바로 치라고요.
죽어야만 끝나는 고통의 대가가 일평생 어느 한순간이라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괜찮은 삶이라 생각됩니다. 그 빛나는 순간을 위해 땀 흘리고 열심히 살아낸다면 반드시 행복한 보상이 있으리라 믿어요.
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동안 어느 정도의 땀을 흘려야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되지만 내가 있는 자리를 잘 지키고 미래를 위해 몸과 마음을 잘 돌본다면 적어도 마음 편한 행복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살다가 너무 힘들어 턱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에 그 힘든 마음을 잘 부여잡고 지금까지 잘 견뎌온 나 자신에게 토닥토닥해 주렵니다.
꽃 좀 보세요.
꽃의 다채로운 색깔에 황홀해집니다. 꽃 향기를 상상해 보세요.
자연의 힘이 없었더라면 저는 해소할 곳이 없었을 거예요. 속 터지는 내 마음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기에는 아직 멀었고 글 한 편 쓰려면 많은 에너지도 필요하고요. 글 한편도 속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지만 자연은 내가 가고 싶을 때 그냥 몸만 챙기면 돼서 좋아요. 빈 손으로 가도 받아주지요.
걷다 보면 내 속의 걱정들은 별 것 아니라고 속삭여줍니다. 그래서 고맙지요.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줍니다. 미웠던 사람도 보고 싶게 만들고요. 그 마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만 그럼 또 찾아갑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한숨 때문에 자연도 늙어가나 봐요.
나를 사랑하는 만큼 자연도 사랑해야지요.
허튼소리가 길어졌네요. 이만 물러가렵니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