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딸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아버지는 늘 바지런히 잘 움직이고 잘 걷고 잘 드셨지. 그래서 난 절대 쓰러지지 않을 줄 알았어.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 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당연히 건강할 거라, 별일 없을 거라 믿으며 살았지.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 저러다 쓰러지시면 어쩌나 싶은 생각을 했었을 거야. 그걸 무의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연세에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좋은 줄로만 알았어. 집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 나가서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아버지는 속으로 병들다가 한 순간 펑하고 터진 거야. 터지고 나서야 막연하게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정말 꿈이길 간절히 바랐어. 꿈일 거라고, 정말 꿈일 거라고.
아버지가 당신 마음처럼 잘 앉지 못해서 쏟아지듯 소파에 앉을 때, 오른손을 못쓰니 왼손으로 바들거리며 밥을 드실 때, 답답한 속을 어쩌지 못해 얼굴이 붉어질 때의 모습을 보고 난 왜, 아버지가 일 하시는 것을 말리지 않았나 다 늦게 후회를 했지.
아버지, 당신의 후회는 오죽했을까.
일 밖에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이 얼마나 후회스러우실까.
팔다리를 잃고 나서 팔다리의 소중함을 깨달으신 거야. 아버지의 뇌는 이미 하얗게 변해버렸지.
여러 번의 뼈수술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떠실까? 몸이 망가져 자식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쓰러진 남편의 손발이 될 수 없는 현실자각은 그야말로 절망 자체였어.
이제 난 생로병병병사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직면하고 망연자실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야.
응급실의 무한 대기상태, 골든타임을 놓쳐 이미 뇌졸중으로 발전한 아버지의 입원을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아버지는 예전의 상태로 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실 거라는 의지가 눈빛에 가득했어.
입원을 하고 간병인을 구하고 드디어 병원침대에 누운 순간, 아버지는 현실을 직감했지.
답답하다고 하소연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이틀이 지났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지. 어떤 심정으로 받으실까? 두렵고 떨렸어.
아버지의 어눌한 대답을 듣고 마음이 저 아래로 치닫는 느낌을 받았어. 힘내시라고,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끊으려는 찰나, 아버지가 '우리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난 눈물이 터졌어. 우리 딸, 그래 난 딸자식이지. 도대체 아버지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딸자식이라는 사람은 뭐 하고 있었나, 그때부터 눈물이 계속 흐르는 거야. 내가 너무 무심한 딸이라는 자책감이 계속 맴돌아서 말이야.
아버지가 우리 딸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난 현실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순간 도망가고 싶어 졌지. 이제 꼿꼿하게 잘 걸으시던 예전의 아버지 모습은 볼 수 없겠지. 지금은 분노로 가득한 아버지가 언젠가는 당신의 상태에 적응하고 체념하기까지 딸자식인 난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말로 아버지를 위로할까?
두렵고 무서워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계속 눈물이 흐르네. 어쩌면 좋아.
누구도 아프지 말고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난 강해져야 돼.
극심한 상실감에 걱정주름이 늘어나는 엄마를 붙잡아 줘야 하고 퇴원하고 더 힘을 내야 하는 아버지의 몸과 마음도 보살펴야 하니까 말이야.
애써 눈물을 참는 엄마의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내 집으로 향했어.
다음에는, 웃을 때 한쪽 보조개가 패이는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