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
이제 쌀쌀해진 방 안 공기 탓에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청했다. 보드라운 이불속 포근함이 오늘 하루의 피곤함을 싹 가셔주는 느낌이다.
커피를 마신 탓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알면서도 마시고 오늘은 참아보자고 해놓고 이미 손은 커피마실 준비를 하고 있다.
밤이 지나 새벽 내내 못된 생각으로 점령당했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한 시간씩 지나있다.
내가 억울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을 심판대에 올렸다. 새로운 각본으로 대화를 이끌면서 나의 분노를 부추겼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분개하며 나의 화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상상 속의 나는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승리자로 끝이 났다. 충혈된 눈은 쓰라리고 마음이 화로 가득하다.
새벽 3시, 화를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낮에 봤던 영어 문장을 기억해보기도 하고 우주 속의 푸른 지구를 떠올리며 같이 돌기도 하고 구구단을 백 번 이상 떠들어도 머릿속은 여전히 또렷하다.
오늘 낮부터 읽기 시작한 소설 '녹나무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거대한 녹나무를 상상하면서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결국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작은 등을 켜고 책을 펼쳤다. 또렷한 정신에 비해 눈꺼풀은 무겁고 눈은 침침했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라 반 이상 읽은 참이었다.
사람들은 어두운 밤 밀초를 켜고 기념을 하러 거대한 녹나무에 찾아든다. 이미 하늘나라에 간 가족이 남긴 유언을 전달받기 위해 영험한 기운의 녹나무를 찾는 것이다.
집중하고 그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중심으로 모이면서 내가 떠올리는 사람이 남긴 생각, 가치관 그 외 모든 것들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에 속한 것들과 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녹나무가 실제로 있다면 내가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뭘까?
반대로 내가 성장하면서 부모님께 받은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는 늘 조용하셨고 엄마는 늘 우리 남매를 못마땅해하셨다.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부모님과 우리는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은 늘 일 속에 파묻혔고 난 그 울타리 안에서 불안함을 안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양갈래 머리를 한 유아 시절과 나무책상에 앉아있는 새까만 바가지 머리의 학생인 내 모습도 기억난다.
그런데 부모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녹나무가 있는 숲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오래전 부모님의 모습을 소환해 보았다.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는 아버지의 표정은 온화하다. 그 옆에서 바삐 움직이는 엄마는 과자 한 봉지를 다 드실 만큼 건강하고 활기차다. 도란도란 대화하다가 싸우다가 새침하기까지 한 모습이 보인다.
몸은 정지한 듯한데 계속 이리저리 움직이는 부모님의 손.
그 손에는 돈을 벌어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오래도록 불 켜진 부모님의 일터는 환하디 환한 등불아래 먼지가 이리저리 흩날리고 후텁지근하고 미싱 돌리는 소리로 번잡스럽다.
내가 아파서 꼼짝 못 할 때 엄마의 손은 내 이마를 짚었고 미역을 불려 죽을 만들어주셨고 머리를 감겨 주셨다. 우리 남매를 위해 좁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찌그러진 은냄비에 달달한 간장소스를 부어 닭조림을 해주셨다. 그 맛이 머릿속에서 느껴진다. 침이 고인다. 엄마의 손은 빠르고 야무지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타고났을까? 보고 배운 것일까?
부모님과의 대화가 생각나지 않더라도 나의 모습은 부모님의 모든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배우고자 하지 않았어도 부모님의 모든 것이 내 몸에 스며있다.
엄마의 무심함 속에 측은지심이 있고 잔소리 속에 애정이 담겨있음을 감지했듯이 내 몸에는 일만 하셨던 부모님의 피도 흐른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생기는 불안감도 물려받았다.
몸이 상하도록 제 몸을 살피지도 않는 것까지.
난 왜 마음이 늘 편치 않을까? 나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걸까? 자신 있게 살아가면 되련만 난 늘 뭔가 모자란 것 같고 불안함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넘어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 바라는 것일까?
나도 명예와 부에 탐닉하고 싶은가 보다.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해 보이고 남들이 우러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보다.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가 보다.
굳이 남들이 보는 나를 이 나이가 되도록 왜, 신경 쓰며 사는 걸까?
내 맘 속은 시기와 욕심으로 가득하다.
지금 아무것도 아니어서 미래까지도 그럴 거라 걱정하는 마음일 게다. 오늘 하루 동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잠이 들까 봐 그런 것일 게다.
아무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일지도 모르는 상태. 그래, 그런 상태가 날 쪼그라들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 노~력으로 인생을 살기엔 너무 팍팍하니 오늘의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미래의 나는 오늘의 고통을 이겨낸 만큼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고통이 기어이 지나 내게 닥쳐 올, 비록 한 줌의 행운일지라도 그 한 줌을 기대하며 살아가면 된다. 우주의 기운이 날 지구밖으로 내몰지는 않을 것이다.
별빛과 달빛 아래 울창한 거목, 녹나무를 다시 상상한다. 녹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내가 살면서 부족했던 것, 내가 갖고 싶은 정신과 육체, 선과 악,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것은 마음의 평온함이다.
지금 어디에고 내밀 명함 한 장 없어도, 미래의 걱정으로 불안감이 엄습해도 불안감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지금 현재를 망치는 감정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뭐가 보이지 않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의 시간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유한 나로, 세상이 선택한 사람이 아닌 내가 세상을 선택하는 자신의 길을 만드는 사람,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 사람, 그리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가지라고 일러두고 싶다.
어차피 인간은 돌고 도는 지구 위에서 불완전한 자신과 싸우며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다.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마음의 축을 꼭 붙들고 살아야 한다. 나는 밤새 그러지 못하였으니 나 자신부터 깨우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