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의 색깔
오후 4시를 지나 산책을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겨울이 오려나보다. 아까비.. ..
아직 여름옷 정리도 안 했는데 겨울이라니, 참.. 세월이 나와 상관없이 꿈처럼 흐른다.
일주일 전에 가봤던 공원을 가봤다. 멀리서 보면 노랗기만 한 것이 뭘까? 궁금해서 다가간 곳은 코스모스 군락지였다. 언제 저렇게 꽃을 화려하게 피웠는지 멈춰 서서 한없이 바라보았었는데.
오늘은 꽃들이 많이 지고 꺾이고 어디론가 숨어들어 정리하고 솎아놓은 듯 단정한 잔디밭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곱디고운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이렇게 예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쩜 이리 고운 색깔을 띠고 태어났느냐. 예쁘다, 이 아까운 꽃잎들을 어찌할꼬.
가을의 색깔들이 하늘거린다.
남편은 여행을 갔다. 남들은 같이 가지 왜 집에 있느냐고 그런다. 내 속은, 밥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밤새 코 고는 소리 듣지 않아도 되고, 잠시 나 홀로 있는 시공간여서 더 좋다. 어디에 있든 남편이 있는 시공간은 티가 나게 마련이라 그 시공간이 잠시 붕 떠서 사라지면 왠지 해방감이 느껴진다. 언제고 그 시공간이 다시 돌아올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
이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이 참 많다. 늘 외로운 사람도 있고 잘 지내다가도 불현듯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외로운 사람은 사람의 정이 늘 고프다. 누군가 잠깐 흘린 미소에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 미소가 악마의 미소라는 걸 알았을 때는 죽음까지도 생각한다.
이젠 인간이 흘리는 숱한 미소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가 되었고 나 또한 이러쿵저러쿵 남 얘기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간다.
늘 있던 사람의 온기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다. 그 사람이 영영 안 돌아오면 어쩌지?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인데 그게 현실이 되면 어쩐담?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다잡는다.
가끔씩 저 현관문을 나서는 나의 가족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늘 내가 아팠어서 내가 먼저 사라지겠지 했는데 남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건 아니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아버님이 계시다. 마음이 저려온다.
고개 숙인 엄마가 생각난다. 아파도 자식 걱정뿐인 사람.
아프신 아버지 생각도 난다. 그 눈빛, 그 절망감, 깊은 한숨.
사람이, 삶이 아프다.
해가 졌다.
호수 난간에 무수하게 많은 거미줄이 쳐져 있다. 열심히 거미줄을 만들며 삶을 이어가는 생명체.
자세히 보니 거미는 한 종류였다. 여러 마리의 한 종류가 터를 잡고 여기저기 꼼꼼하게 또는 얼기설기 엮어놓은 거미줄을 보니 섬찟해서 한 발짝 물러났다. 정신 차리고 가로등에 비친 모습을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참으로 신기한 먹이활동.
정지한 듯 가만히 있다가 불쑥 날아들어온 다른 벌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잡아먹는 모습을 보았다.
빛을 쫓아 잠시 쉬려고 앉은 곳이 생의 마지막이었다니.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벌레를 보니 약자의 아픔이 밀려왔다. 모든 생명체는 강자이면서 약자이다.
거미 몸통이 가로등의 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나에게 레이저를 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벌레에 대한 공포는 어릴 때부터 새겨진 기억이라 아직도 벌레만 보면 오두방정을 떤다.
어릴 때부터 몸과 마음에 새겨진 기억들은 참으로 질기고 끈질겨서 떨쳐내기가 힘들다. 어떤 외로움, 두려움, 소외감, 공포감, 그런 것들.
내일이면 더 둥그레질 환한 달이 둥실 떠있다.
유일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광활한 우주의 달, 그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은 소원을 빌었었나. 잠들기 전, 베란다 창틈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쳤던가, 그 달이 내 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