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베리, 메리크리스마스

by oh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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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금씩 표정이 변해갔다. ‘영어’라는 언어가 결국 ‘지능지수’와 같은 말로 통하는 순간이었다.


‘오 마이갓!’, ‘오노!’


모든 가족들이 외치는 와중에 검은 머리 밤비노는 ‘자막 없이도 퀴즈 프로그램을 봐도 괜찮다. 나를 신경 쓰지 마세요.’하고 조금씩 쭈그러들고 있었다.


영국에서 일주일이 남은 순간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영어 걸음마 수준인지라, 영어로 싸울 정도의 실력은 안된다. 괜히 27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미웠다. 이걸 21살에 했어야 했다. 못하는 것이 ‘어른인데 못하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 내 나이가 겁이 났다.


결국 저녁준비를 돕겠다는 핑계로 1층 거실에서 지하 주방으로 발뒤꿈치를 들고 내려갔다. 지하, 1층, 2층, 3층 구조의 집이었다. 네 식구가 쓰기에는 큰 집이지만, 동네에서는 큰 편이 아니었다. 나는 자주 주방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가장 나를 편안하게 하는, 베이스캠프였다.


토니아저씨와 그린이모가 바쁘게 움직였다. 일상이었다면 저녁은 ‘토니’ 담당이다. 그린이모는 6시쯤 온다. 그린이모는 우리나라로 치면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는데, 늦게 마친다. 건설업을 하는 토니는 사장이라서 그런 건지, 4시 반이면 장까지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은 냉동실이 없다. 딱 먹을 만큼만, 딱 필요한 만큼만, 냉장으로 계속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매일 장을 본다. 그리고 토니가 장도 보고 밥도 한다. 대학 다니는 어린 아들이 아무리 3시간 거리의 먼 거리에서 방학을 보내러 와도 그렇다. 아들이 메뉴는 정해도 밥은 토니가 한다. 주는 대로 아니고, 원하는 메뉴대로. 엄마가 밥 짓고 아빠가 티비 속에 들어가서 ‘물!’ 외치지도, ‘에헴’ 하지 않는다. 나는 80년대에 살고, 아마 여기는 2030년은 되는 것 같다.


오늘은 특별했다. 그린이모의 친척들이 왔다. 크리스마스는 대 명절이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있다. 바로 나, 까만 머리 연아.


내 이름은 종련이지만 아주 어려운 발음이라 ‘연’이라고 부른다. ‘련’이라고 했지만, ‘리연’인지 ‘려인’인지 중요하다고 했다. ‘In English'라는 말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규칙이나 약속이나 이러나저러나 나는 여전히 종련이지만, 순서와 발음이 중요했다. 언제나 중요했다. 만나는 ‘원어민’마다 중요했다. 그래서 리연 혹은 연, 아니면 연아.


유럽 친구들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으러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왕복 150만 원을 쓸 돈도 없었다. 10일 남짓 남았다. 그게 사실을 가장한 핑계였다. 그래서 가족들의 오붓한 시간에 ‘연이’가 함께하기로 했다. 흔쾌히 ‘밤비노’가 되었다. 열심히 나의 몫을 하기로 했다.


1. 분주하게 크리스마스 식사 세팅을 하고, 둘러앉아 케이크와 음식을 먹었다.

2. 물론 명절이라고 메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3. 여전히 인디언 푸드트럭 음식을 포장해 왔고, 오븐에 구운 감자에 크림도 올라갔다.

4. 캔 참치에 마요네즈와 당근, 브로콜리, 완두콩을 넣은 큰 보울에 버무렸다.

5. 올리브와 소금, 후추를 올린 샐러드도 있었다. 따뜻한 옥수수 수프와 주먹모양의 포실한 빵이 향기와 온기를 더했다.


이제 겨우 불편한 것들도 괜찮아질 때쯤이었다. 식사시간은 약 1시간 정도 되는 것 같다. 식사시간에 최대한 모양새를 갖추는 것, ‘모든 정치, 역사, 경제’에 대해 궁금해하는 영국인들이었다. 모든 영국인들과 식사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토니와 그린이모는 그랬다. 우리나라의 밥상머리예의에는 경을 칠 노릇이지만, 대체로 일상이다. 영어는 당연히 못하지만, 진지하게 카테고리를 나눠서 내 생각을 정리할 만큼 내 삶과 유착되지 않았다.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우스갯소리, 진실, 그런 것들이 아니어도 ‘I think'를 마지막에 붙이면 다들 고개를 끄덕여줬다. ‘I think' 그 단어는 마술과도 같았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판단이나 평가를 하지 않고, 들어주고 질문했다. 식사가 이런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더욱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식사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정리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모였다. 거실 가장자리로 엄청나게 큰 트리가 있고, 그 앞으로는 성인 여자만 한 빨간 자루가 있다. 이미 대학생인 자녀에게는 언제나 엄마였다. ‘에-이-’하는 환호성과 함께 대학생 자녀들은 선물을 꺼낸다. 바디워시, 장갑, 핸드로션..


그리고 바닥난 인내심이 드러났다.


“엄마, 고마워. 근데 엄마도 알다시피 갈 때도 짐이 많아서 이건 집에 두고 가야 할 것 같아.”

“응 그렇겠지! 이해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데, 씁쓸했다.


“이렇게 많은 선물도 좋지만, 아이패드 같은 걸 받고 싶어.”

‘오---케-이’ 하며 늘어지는 말투에서 슬픔의 냉기가 흘렀다. 냉장고에서 딱히 먹을 것이 없을 때 잠깐 찾아오면 그런 빈틈. ‘흠’이라는 감탄사가 같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트리 밑에 ‘나의 대형 양말’도 있었다.


‘R-Yun'이라고 적힌 카드와 함께.. 귤 초콜릿, 바디워시, 장갑, 핸드로션..

하나, 둘 꺼내며 소중하게 반응해 줬다.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선물을 준비한 게 없어요.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마. 좋아하는 모습을 보려고 선물을 주는 거야. 내 기쁨이야.”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부모의 모습. 선물 받는 사람을 생각해서 선물해야 하는 것.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2주 동안 ‘어떤 선물을 사야 하지?’ 라며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자주 봤다. 왜 그런가 생각했는데, 아마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27살의 크리스마스...

꿈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의 꿈이 빠른 속도로 현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리연에서 종련으로 바탕화면이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