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말고 글, 글 말고 말
어렵다는 말도 있고, 수고스럽다, 고단하다, 마음이 쓰인다,라는 말도 있는데, 결국 가장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은 '힘들다'는 말이다. 사는 게 힘든 이유는 모두 다른데,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달래는 방법은 비슷하다. 이유를 찾기 위해 명사(名士) 들을 찾는다. 우리들의 영원한 쎈언니 '김미경' 선생님부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게 되는 박창옥 선생님, 법륜 스님, 정혜신 박사님, 괴테 할머니 등 지혜를 얻기 위해 영상이나 책을 본다. 그렇게 공부를 해도 시간이 쌓이면 '본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많은 이야기들과 명언들이 내 귀로 들어올 때, 가끔은 변질되기도 한다. 듣고 싶은 쪽으로, 보상심리에 적합하게, 혹은 모든 슬픔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결혼 이후, 출산 이후, 장사시작 이후'라고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고단한 삶'이 '프리사이즈'옷처럼 공통이라는 걸 알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삶이라는 게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게 지독한 통증 같다. 그래도 꼭 하나를 뽑자면, 2022년이다.
당시 시아버지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막내아들인 남편 가게를 도왔다. 힘들다고 말한 적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심하게도 어떤지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작은 일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된다는 말 없이, 항상 '그래'라고 대답하셨다. 장사 5년 차, 각자의 일에 능숙해졌을 시점이었다. 시아버지-남편-나 이렇게 셋이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오후 늦게 출근했다. 얼마나 꿀맛이던지. 잠을 푹 자기도 하고, 영화나 미술관에 가기도 했다. 그런데 2022년, 쉬는 날이 없어졌다. 내가 쉴 날짜가 되어서, '이번에는 안 되겠다'라고 말하셨다. 간이 좋지 않아서 매번 초음파로 정기검사를 하셨는데, 담당자가 간 옆면 색이 이상하다고 서울 대학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단다. 다행히 보험 특약을 써서 빠르게 예약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의 암선고에 집안이 뒤흔들렸다. 가장 슬퍼했던 건 남편이었다. 수술 날짜를 잡고 시아버지는 가게에 관련된 모든 물품들을 반납했다. 남편은 결국 꾹 참던 눈물이 터졌다. 시아버지의 2cm 수술 부위, 남편의 2천 미터보다 깊은 자책이었다. 바다의 파도는 같은 방향으로 몰아쳤다.
쉬는 날 없는 일상은 지옥 같았다. 매일이 '글 보다 말'이었다. 엉망진창의 말투와 태도였다. 자세한 표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비유도 설명도 불가능하다. 항상 화나고, 항상 억울했다. 일을 하나씩 끝내는 게 아니라, 하루씩 끝냈다. 아이도 어렸기 때문에, 쉬는 날에는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가야 했다. 부모역할과 자식역할이 형벌 같았다.
아침 태양이 뜨겁기만 했다.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축 쳐진 빨래를 널면 멀리 하늘이 보였다. 높은 하늘이 아래의 땅보다 더 낮아 보였다. 매일, 마음속에 지옥을 탈출하는 방법은 인생을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늘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은 깊숙이 숨었고, 어두운 마음이 어디든 기어 다녔다. 매일 술을 마셨고, 매일 남편과 싸웠다. 아침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러시안 블루, 내가 느낀 이병률 시인의 마음 색깔이다. 회색과 파란색은 섞였지만 탁하지 않은 투명한 슬픔이었다. 책은 글을 읽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십자수 하듯, 뜨개질하듯, 글자를 촘촘하게 읽었다. '말 말고 글', 고요하면서도 적막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시 한 줄마다 공감과 위로가 있었다. 내 마음은 슬프다는 걸 인정했다. 기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수평의 삶을 만들면 된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 그제야 남편이 보였다. 남편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아이는 얼마나 자랐는지, 부모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