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문학과 지성사
타자를 칠 때마다 종이에 베인 손가락이 아프다.
아무리 조심해도 다친다.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위험한 때는 '방심하는 순간'이다.
오후장사를 위해 양파를 썰었다. 재료 손질하기 전에, 칼부터 갈았다. 2개의 협곡이 있다. 칼을 첫 번째 칼갈이에 대고 앞에서 뒤로 일정한 속도로 긁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하나, 둘, 셋... 처음에는 걸리는 '드르륵' 길게 소리가 나다가, 20번쯤 갈았을 때에는 '갉'하며 준비를 알린다. 엄지와 검지로 면을 동시에 만져보면 느껴지는 날카로운 칼끝은 든든하기까지 하다. '칼을 가는 의식'은 어쩌면 기분을 위한 걸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30번을 갈아야 그 기분이 나고, 어떤 날은 10번으로도 그런 기분이 든다. 마지막으로 연마하는 협곡 칼갈이에 대고 앞뒤로 긁는다. 숫자를 세지 않은 채, 샤워하고 물 닦듯, 밥 먹고 숟가락 핥듯, 타자를 치고 손가락을 꾹꾹 누르듯.
칼이 가장 위험할 것 같은데, 정작 손은 항상 종이박스에 다친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다가, 다른 곳을 보다가 어김없이 다친다. 얕을 때도 있고, 깊을 때도 있지만, 상처에 대한 내 자세는 '피만 멈추면 다 나은 것'이다. 피가 흐른다고 다 아프지 않고, 아프다고 다 피가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피가 멈출 때까지 계속 밴드를 갈고, 흐르는 피를 씻어낸다. 피만 멈추면 아픔도 잊는다. 일에 대한 나의 자세이기도 하다.
퇴근, 이제야 컴퓨터 앞에 타자를 치며 자세히 보이지도 않을 새끼손가락을 신경 쓰고 있다.
마치 밤을 위해 12시간을 쓴 사람처럼, 밤이면 다시 밤의 체온을 느낀다. 바다의 체온이 닿는다.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사는 사람이 왜 없을까, 하다가도, 그게 나일 필요 없다, 주먹에 머리를 '콩'소리가 나도록 박는다. 마음을 둥글게 또 둥글게 쓸어내린다.
그래서 잠들지 못한 밤, 그러나 깨어버린 새벽, 지나가버린 월요일이 되었다.
칼처럼 칼갈이에, 밤이니 밤갈이에 갈수만 있다면, '밤을 가는 의식'을 갖고 싶어진다.
날카롭고 든든하게 마음을 만들고 싶어진다.
밤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본다. 오늘의 질문, 최초의 나의 글은 무엇이었을까? 더듬어 보려 노력하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식으로 무엇을 가장 처음 먹었는지, 첫 분유맛은 어땠는지, 엄마 뱃속에서 뭐가 맛있었는지, 그런 걸 기억하려 하는 것만 같다. 무의미한 기억,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
임의로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병률 시인 독후감'이다. 예전에는 '팬심'에 합류하는 게 무서웠다. 첫째로, 좋아하는 것 치고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시를 외운다거나, 작품세계를 이해한다거나, 최소한 시적 배경을 감상하는 태도도 내 마음대로다. 정확하게는 좋아하는 마음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책에 한정적이고,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 발전하지 않고 수동적이다. 생년월일이나 책 목록, 북토크 참여처럼 열정을 시험하는 것만 같은 팬심이 없어서, 광팬이라고 말하기 조심스럽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이름 세 글자에 미세하게 반응한다. 만들어야 한다면,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다.
그의 회색빛깔 바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푸른 끼 도는 겨울 눈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늘색이 가득한 그의 나무 의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알 것 같아'를 남발하며, 그의 시를 한 줄씩 읽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내가 뭐든 열심히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도, 화를 낼 때도, 모르는 척 무시하려 애쓸 때도, 나는 정말 열심히 한다. 마음속에 타이머를 항상 켜놓고 있었다. 일을 할 때도, 최소한의 숨을 쉬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 숨을 쉬기 위해 숨을 참는 사람처럼, 뭐든 열심히 한다. 나를 돌보려는 생각을 아주 쏙 빼고 말이다. 아마도 이병률 작가님의 첫 책을 읽을 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병률 작가님을 만난 첫 책은 '혼자가 혼자에게'였다. 그 시작은 온라인 교보문고 첫 화면 신간안내를 보고 충동적으로 샀다. 책을 읽으며, '마법사의 아들 코리'에 나왔던 털보 수염을 가진 '코리 아빠'를 떠올렸다. 내가 그렸던 이병률 작가님은 전체적으로 몸이 굵었다. 손목 발목 굵고, 수염을 자르지도 않고, 어느 동화책에서 본 삽화를 떠올렸다. 병원에 아파 누운 부인을 대신해서 아이를 돌보며 고군분투하고, 수제비를 끓이다 콧물이 빠졌다고 아이에게 더럽다는 말을 듣는 아주 보통의 코리아빠.(동화책은 왜 이렇게 제목 찾기 어려운 걸까...) 아마도 몸이 고되어 매일 감기를 달고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상과 닿았는데, 또 일상을 떠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남동생에게 물려줬다. ㅡ우리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위로받을 것이다ㅡ말했다.
그제야 작가를 검색하고, 인터뷰와 북토크 영상을 찾아봤다. 메마른 입술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음색과 나긋한 음률, 쉴 틈 없이 깜박이는 옅은 눈꺼풀, 말하는 모든 문장이 음악 같았다.
작품으로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모든 책들을 연결해서 읽게 된다. 기승전결이 없는 사이건만, 내 평생 동안 제일 큰 감동은 '바다는 잘 있습니다'시집을 만난 것이다. 감히 평가하자면, '동경'과 같다. 그 외 단어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 책으로 바다를 그리고, 바다가 그리울 때는 기꺼이 꺼낸다. 목차는 그대로인데, 시가 자꾸 바뀌는 것 같다. 어떤 시도 정확하게 외우지 못해서일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시가 읽힌다.
내 밤의 체온은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동경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을 읽는 동안의 계절이 '지금의 계절'과 상관없는 나의 온전한 계절이다.
잠 못 이루는 날들을 기억해 보면,
항상 있었다. 그 자리에, 그렇게, 모서리가 조금씩 낡으며.
이제는 당당하게 '나답게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이병률 시인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나는 그저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니 오늘도, 성적 상관없이 급식과 쉬는 시간 매점에도 행복한, 학교 즐겁게 다니는 학생처럼 책을 펼친다. 힘든 날, 이겨낼 학창 시절 시인을 동경하던 마음으로 오늘도 시집을 펼친다.
뒤늦은 바다의 알림, '바다는 잘 있습니다.'
메아리의 끝이 그림자 같아 울컥한다.
그리하여 나도,
상처 난 새끼손가락까지 모두 모아,
ㅡ나도 잘 있습니다ㅡ응답해 본다.
ㅡ잘 있을게ㅡ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