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작가님의 솔직함으로 (세계사 출판)
전환점이기도 하다. 작품을 읽은 전후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독서를 통해 인생에 대하여 여러 단계로 느꼈고, 생각이 변화했다. '나목' 표지를 마주했을 때, 제목이 반듯하게 보였다. 액체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마음들이 공수자세를 하는 듯했다. 같은 크기와 굵기라도 소설 제목보다 작가 이름이 진했다.
최초에는 두려웠다. 이 소설 전에 '엄마의 말뚝,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보면, 뚜렷해지는 성격들이 있다. 박완서 작가님은, '솔직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만나는 솔직함이란, 야하거나 거친 표현과는 느낌이 다르다. 자신이 녹아있는 듯한 생동감이라고 하는 게 가까울 것 같다. 그 솔직함에 취해 울고 웃고, 줄어들고 펼쳤다. '엄마의 말뚝'에서 날카롭게 통찰하는 맛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제2의 박완서'의 'ㅂ'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좌절했다. 감동과 충격의 여운이 오래갔다. 다른 이야기들로 겹겹이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마침내 나목을 찾았다. '작가가 가장 애정하는 첫 작품'이라는 말 때문에 쉽게 읽고 싶지 않아서 참을 만큼 참기도 했었다. 물론 그 안에 나는 자영업자 워킹맘이지만, 블로그로 글을 쓰고, 내 안에도 리틀 박완서가 있기를 항상 기도했다.
독서가 차곡차곡 쌓였지만, 나목은 내가 사랑하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책장에 꽂아 놓고, 사람이 힘들어지는 날이면 위로받곤 한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출근길에 무거운 짐을 이고 나오면서, 하늘색인지 흰색인지 구분되지 않는 맑은 하늘, 비 온 뒤 배부른 푸른 풀잎사귀, 늠름하기까지 한 굵은 나무의 허리를 바라봤다. '나만 힘든 거 아니다. 힘든 내색을 하면 힘들지 않은 일도 힘들어진다.' 원론적으로 다독였다. 내가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면서 ㅡ 결국 남들과 함께일 때의 더 중요하다 살며시ㅡ 여겼을지 모른다. 문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독서기록을 펼쳤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읽을까? 먼저 단어들을 봤다. '가족, 섬뜩했다, 도덕성, 일'등의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단어들은 그때의 어린 마음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플래그들을 다시 읽으면 ㅡ 하루를 겪는 동안, 나목인가 고목인가를 골똘히 ㅡ 나를 추스르는 시간을 다시 가졌다. 가진 물건과 감정들을 나누는 공동체에 삐딱한 시선을 가진 나를 스스로 미워했었다. 말미에는 나목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
"가족은 무엇인가? 최소한 나에게는, '애정이 생기는 범위'다."
쓸 당시에는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애정이 있다면 가족이 되고, 가족이라도 애정이 없으면 앙상한 관계라는 뜻 같기도 하다. 마음은 항상 모든 글의 배경이다.
대목마다 끊어서 감정을 분출할 때도 있었다. 나목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분노가 끝까지 다다랐다. 양쪽 저울에 놓고 이리저리 굴리는 마음의 무게를 달래느라 애먹었었다. 특히 옥희도 씨는 등장만 해도 화가 났다. 예술가도 현실을 산다. '도덕과 자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말주변이 없어 그대로 진실을 말했다(373쪽)'라는 옥희도 씨를 보며 세상을 여러 단계로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여기에서 '여러 단계'는 매우 부정적인 말이었다. 여전히 언제든 하면 된다는 문장과 인생은 한 번뿐이다는 생각이 빅뱅과도 같이 충돌한다.
그때는 옥희도 씨의 생각들이 '확실히'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그럴까? 반문하게 된다. 언제든 그저 실패 직전의 문장이 가장 희망적인 법이다. 항상 선택해야만 하고, 성공과 실패는 많은 경우의 수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갈팡질팡하는데, 확언할 수 있을까?
나목과 고목 중에서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국어사전에 나목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다.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정의와 인생의 정의가 다를 수도 있다. 경아는 옥희도 씨의 작품을 보며 '나목과 고목'을 구분했다. 소설 속에서는 고목은 죽은 나무였다. 그리고 나목은 봄을 기다리는 나무라고 마무리한다. 복잡한 생각들이 지속하기 위해 공회전할 때가 있다. 움직이지만 멈추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만 소모한다. 저울질하다가, 뚫어져라 보다가, 나란히도 두었다가, '나는 나목과 고목 중 어떤 것일까?' 인생의 목적을 정의 내리기도 한다.
나는 세상을 여러 단계로 사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자신만의 규정으로 오로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여러 단계로 살아가고 싶다.
선택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면,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단순하게 말해보고 싶다.
나목으로 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