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전 그냥 접니다
오전 8시 43분
31분 출발이 43분 출발이 되었다
연착되었으나 결국 올 것이라 믿었다
온다는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으므로
이른 아침은 선선한 여름이었다
챙겨 온 남방이 짐처럼 느껴지다가도
쌀쌀함이 올 것이라 믿었다
계절도 취소하지 않았으므로
거짓 없는 기차 밖 풍경에
숫제
여름내 그녀의 가슴이 떠올랐다
벗지 않았으나 얇은 티셔츠에 옅게 비치는 속옷
색과 실루엣이 파티 속 여인 같았다
그건 정말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잃어가는 여성성을 드러내기에
똑똑한 그녀는 알고 있었구나, 했다
메마른 번화가 대로변
유리창에 빨갛게 써놓은 임대 글자 사이
검은 내가 보였다
풍덩한 검은 옷 검은 신발 검은 가방을 둘렀다
앞치마대신 내의까지 받쳐 입고
한걸음을 검은 다리로 길고 크게 걸었다
지나가던 어떤 남자와 커플이 되었다
우리는 올블랙과 체크남방을 사랑하는 파리지앵
나는 똑똑하지 않아서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했다
외모라고 이름 지어지는 순간이 많아서
가끔은 몸에 털을 주렁주렁 달고 싶다
동작보다 행동으로 나를 살게 하고 싶다
모두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순간의 연속
씻고 마르고 나면 다를게 없어진다
모두가 같아진다
잘나면 좋겠네 정말로,
그러지 않아도 되면 더 좋겠네 정말로,
풍경에게 하소연했다
기차 창밖 풍경에 떨어져 있는 생각들이 있었다
아줌마는 최신핸드폰을 사지 않아도 될 거라고 했고
열 살이나 많은 동네분은 내게 이모라고 불렀고
어느 가게에서는 내가 애엄마 아니고 노처녀 같다고 했다
포괄적인 젊음에 취하고 싶다
아니, 나도 머리를 볶고 분홍옷들을 입어볼까
단지 읽고 쓰는 것밖에 나다운 게 없어서
침잠하다
그러나 침습하는 한이 있어도
결국 나로 올라올 것이다
나는 나로 사는 것을 취소한 적이 없으므로
취소할 리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