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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세탁기

2023년12월27일_수요글방

by 오밀조밀

다 된 빨래에 물이 흥건했다. 세탁기는 평소 설정 그대로였다. 고장이었다. 풀 옵션 1.5룸. 2구짜리 가스레인지 아래 들어가 있는 아주 작은 세탁기였다. 엄마와 나, 동생 3인이 쓰기엔 너무 작았다. 2년 넘게 하루에 한 번 꼴로 돌렸다. 고장 나고도 남았을 세탁기인데 이제껏 버텨줘 다행인가. 엄마에게 수리 업체를 알아보라고 하고 서둘러 출근했다.


며칠이 지났다. 1.5룸 방 안 건조대에 널린 빨래 밑에 수건이 깔려 있었다. 엄마는 세탁기가 고장이 난 건지, 그날만 안 된 건지 몇 번을 더 돌려봤다고 했다. 때도 지워지고 섬유유연제 향도 나는 걸 보면 탈수 기능만 고장이었다. 수리비를 알아보니 50만원이 든다고 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30만원. 얼마 전 재계약을 해서, 앞으로 지낼 날이 2년정도 남았지만 세탁기 수리비로 50만원을 쓰자니 아까웠다. 현관문 도어락이 고장 나 교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도어락 교체에도 20만원을 썼다. 현관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쾅쾅 소리를 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관문에서 도어락이 쏙 빠졌다. 당장 문을 닫을 수 없으니 20만원을 아까워할 틈이 없었다.


도어락은 1.5룸의 유일한 안전장치였다. 도어락보다 한 뼘 위에 쇠로 된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불안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밖에서도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저렴한 집을 어렵게 구해 좁게 살면서 안전은 최우선이었다. 도어락을 고친 그날 저녁, 수리비로 20만원이나 들었다면서 문을 좀 더 자주 여닫자고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것도 농담이라고 좀 웃었던 것도 같고.


하지만 세탁기는 달랐다. 하루에 한 번 꼴로 썼지만 엄마와 나, 동생의 안전과는 거리가 멀어서 였을까. 당장 고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세탁기 수리비가 도어락처럼 20만원정도였다면 달랐을까.


월급 180만원. 월세로 30만원, 관리비로 10만원 남짓이 나갔다. 남은 돈에서 100만원정도를 생활비로 쓰면 여윳돈은 고작 40만원이었다. 평소보다 병원이라도 몇 번 더 가거나, 화장품을 더 산 달엔 그보다 더 적었다. 도어락을 고치고 세탁기까지 고치려면, 생활비를 아껴 모아둔 통장에서 돈을 빼야 했다.


엄마는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갑자기 작동이 잘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평소라면 말 도 안 된다고 단번에 선을 그었겠지만, 그날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50만원을 어떻게든 안 써보려고 불가능에 희망을 걸었다. 그렇게 우린 50만원을 쓰지 않았다.


며칠 뒤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1.5룸 거실과 방에 불이 모두 켜져 있는데 엄마는 없었다. 심지어 베란다 불까지 켜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베란다에서 무언가 했을 엄마가 안 보였다. 신발을 벗고 발을 딛고 보니 방 안 화장실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문턱까지도 물이 흥건했다. 엄마는 두 개의 커다란 바가지 앞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평소 화장실에서 애벌빨래를 할 때 쓰던 바가지였는데, 다른 하나는 교회 점심 당번 때 야채를 담던 아주 큰 바가지였다. 도대체 이런 바가지까지 가져와서 할 일이 뭐지, 순간 멍했다.


엄마는 얼굴이 시뻘건 채로 빨래의 물기를 하나씩 손으로 짜고 있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겨울이었어도, 여름이었어도 엄마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빨갰을 테니까.


50대의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무릎이 아프고 손목이 시렸다. 엄마는 탈수 기능이 멈춘 세탁기를 대신해 빨래 물기를 짜냈다.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접고 쪼그려 앉아 시큰거리는 손목으로 모든 빨래를 쥐어짰다.


그 날도 어김없이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아래에 수건을 깔았는데 평소보다 떨어지는 물의 양이 많았다고 했다. 이대로 뒀다간 건조대 아래 깔 수건도 부족하겠다 싶어 직접 물기를 짜야겠다 싶어 화장실로 갔다고 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때 알았다. 수리비가 500만원이라 해도 세탁기는 당장 고쳤어야 했다. 엄마가 직접 빨래를 짜는 날이 오기 전에 수리를 했어야 했다. 후회와 서러움을 드러낼 순 없었다. 탈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50만원을 들여 세탁기를 고치자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며칠 뒤 정말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보증금이 1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인 건 모르지만, 집이 1.5룸인 건 아는 친구였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꺼내다 세탁기 이야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울었다.


여전히 서류상 엄마의 남편이자 나의 아빠로 남아있는 사람이 가족을 팽개친 상황까지 알고 있는 친구였다. 내 말이 끝나자, 왜 남자들은 나이를 들어도 철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자기 아빠 이야기를 했다. 한참 아빠들을 욕하던 친구는 그래도 세탁기를 고쳐서 정말 다행이라고, 엄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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